03화 제기동 낡은 방과 낯선 숫자
겨울의 끝자락은 항상 녹다 만 눈처럼 질척거렸다.
도덕산의 바람이 날카로운 칼날이었다면, 제기동의 바람은 눅눅하고 서늘한 물걸레 같았다. 베는 것이 아니라 스미는 것. 어쩌면 그쪽이 더 오래 남는 추위였다.
그러나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의 공기는, 제기동도 철산동도 아니었다.
손바닥을 펼쳤다. 2025. 숫자는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열기가 남아 있었다. 불에 덴 것처럼. 나는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귀 안쪽이 울렸다. 내 앞으로 거대한 쇳덩어리 하나가 빛을 내뿜으며 소리 없이 미끄러졌다. 자동차라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조용하고, 이렇게 크고, 이렇게 많을 수가 없었다. 간판들이 밤하늘을 대낮처럼 밝히고 있었다. 어떤 간판은 그림이 움직였다. 사람들은 손바닥만 한 유리 조각을 들여다보며 걸어 다녔다. 아무도 나를 보지 않았다.
나는 골목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무릎이 떨렸다.
여기가 어디지. 여기가 2025년인가. 그럼 저 사람들은 미래 사람들인가.
왼손이 다시 저릿했다. 돌아가라는 신호인지, 더 나아가라는 신호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손바닥을 가슴에 꼭 눌렀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어머니의 고른 숨소리가 떠올랐다. 연탄가스 냄새가 떠올랐다. 제기동으로 이사 가는 날 트럭 짐칸에서 바라보던 철산동 골목의 마지막 풍경이 떠올랐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제기동에 있었다.
1988년 2월의 마지막 날들, 우리 가족은 경기도 광명의 연립주택을 떠나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의 낡은 기와집으로 이사를 왔다.
아버지가 친인척들에게 고개를 숙여가며 빌린 자본금으로 마장동 우시장에 정육 도·소매 점포를 냈다는 소식이 이 거대한 변화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열한 살 소년인 내게 사업이나 기회 같은 단어는 너무나 멀었다. 내 눈앞에 닥친 현실은 낯선 동네의 비릿한 공기와, 다섯 식구가 살기엔 터무니없이 비좁은 방 두 칸뿐이었다.
어른의 꿈이 시작되는 날, 아이의 세계는 그만큼 좁아졌다.
기름보일러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아버지가 마당 구석에 성벽처럼 쌓아 올린 검은 연탄 수십 장이 우리 가족의 유일한 난방이었다. 방 안에는 늘 역한 연탄가스 냄새가 뱀처럼 기어 다녔고, 아침마다 아버지가 집게로 연탄을 갈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매캐한 연기는 목을 따갑게 긁어댔다. 그 냄새에 익숙해지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아마도 익숙해진 것이 아니라 그냥 포기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건 화장실이었다.
화장실은 집 안에 없었다. 대문을 공유하는 서너 가구가 함께 쓰는 공용 화장실은 마당 저편 외진 곳에 있었다. 낮에도 그늘진 그 자리는, 밤이 되면 더욱 깊고 어두워졌다.
밤중에 잠이 깨면 차가운 슬리퍼를 끌고 칠흑 같은 마당을 지나야 했다. 코를 찌르는 암모니아 냄새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바스락 거림이 가득한 그 낡은 목조 화장실 문을 여는 것은, 소년에게 매일 밤 찾아오는 지독한 공포였다. 무서운 것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무서운 것이 없다는 것을 어둠 속에서 매번 스스로 증명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증명이, 열한 살에게는 너무 자주 요구되었다.
뜨거운 물을 쓰려면 어머니 전윤희가 연탄아궁이에 커다란 양은솥을 올려 물을 데운 뒤, 무거운 양동이로 퍼 날라야 했다. 그 물에 온 가족이 돌아가며 얼굴을 씻는 것이 고단한 하루의 끝이었다. 식어가는 물에 손을 담글 때, 온기란 순서가 있는 것임을 나는 일찍이 배웠다. 그리고 우리 집에서 내 순서는 늘 마지막이었다.
방 하나는 부모님이 쓰고, 나머지 방 하나는 우리 세 남매의 차지였다.
나는 두 살 터울의 누나 수현과 그 방을 썼고, 일곱 살이나 많은 큰형 성훈은 고등학생이라는 특권 아닌 특권으로 방 끝에 위태롭게 딸린 쪽방 같은 골방을 차지했다. 형의 골방은 좁았지만, 혼자였다. 나는 가끔 그 좁음이 부러웠다. 혼자라는 것이 외로움이 아니라 자유일 수 있다는 것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하면서.
"야, 조운. 이 선 넘어오면 죽는다."
예민해진 누나는 제 책가방으로 방 한가운데에 경계선을 그었다. 나는 대꾸조차 하지 않고 구석에 웅크려 앉았다. 누나의 날카로운 말 뒤에 숨겨진 가난에 대한 두려움을, 나 역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나도 무서웠을 것이다. 나처럼. 우리는 같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그것을 숨겼다. 누나는 날카로워졌고, 나는 조용해졌다.
부모님은 새벽같이 마장동 우시장으로 출근하셨고, 집에는 우리 삼 남매의 서먹한 침묵만이 연탄가스처럼 고여 있었다. 가족이 한 지붕 아래 있다는 것이 곧 함께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이사 온 지 사흘째 되던 날, 어머니는 내게 천 원짜리 한 장을 쥐여주며 두부 한 모를 사 오라고 하셨다.
처음으로 혼자 나선 제기동 골목길은 미로 같았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대문들, 좁고 어지러운 골목길 사이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웃음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나는 그들의 견고한 세계 속에 불쑥 끼어든 불청객이자, 언제 떠날지 모르는 이방인이었다.
두부를 사 들고 돌아오는 길, 나는 골목 어귀에서 잠시 멈춰 섰다. 어디선가 연탄 냄새가 났다. 철산동에서도 그 냄새를 맡았다. 냄새만큼은 이사를 하지 않은 셈이었다. 나는 그 냄새를 따라 집으로 돌아갔다. 낯선 곳에서 익숙한 것을 찾는 일. 그것이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방구석에 앉아 낡은 공책을 펼쳤다.
또다시 혼자가 되겠구나 하는 공포보다 더 무서운 건, 곧 가게 될 홍파초등학교에서 내 왼손이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하는 걱정이었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새 주소를 오른손으로 꾹꾹 눌러써보았다.
서울시 동대문구 제기동….
글씨는 지렁이처럼 비뚤거렸고, 손가락 마디는 하얗게 질려 욱신거렸다. 만약 새로운 선생님과 친구들이 내 비뚤어진 글씨와 왼손을 보고 수군거리면 어떡하지. 그 불안감이 축축한 이불처럼 온몸을 짓눌렀다.
나는 공책을 덮었다. 덮는다고 걱정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다만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어쩌면 어른들이 내 왼손을 그렇게 대했던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 없는 것처럼 대하는 일. 그것이 이 세상이 불편한 것을 다루는 방식이었다.
잠이 오지 않는 밤, 나는 이삿짐 상자 구석에서 낡은 야구공 하나를 꺼냈다.
손때 묻어 반질반질한, 유일하게 온전한 내 물건. 철산동에서도, 도덕산 비탈에서도 내려놓지 않았던 공. 나는 익숙한 왼손으로 아주 낮게, 천장을 향해 공을 던졌다 받았다.
통, 통.
공이 손바닥에 부딪히는 작은 진동만이 낯선 제기동의 방 안에서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신호였다. 이 소리만큼은 아무도 오른손으로 바꾸라고 하지 않았다. 이 어둠 안에서만큼은, 왼손이 틀리지 않았다.
통, 통.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은 내게 희망이 아닌, 또 다른 혹독한 겨울의 시작이었다. 봄이라는 계절이 모든 아이에게 공평하게 오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아이에게 봄은 아직, 훨씬 더 멀리 있었다.
그때였다.
공이 손바닥에 닿는 순간, 왼손이 갑자기 타오르듯 뜨거워졌다. 야구공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손바닥을 뒤집어보았다.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피부 아래에서 무언가가 빛나고 있었다.
숫자가 아니었다. 이번엔 글자였다.
— 아빠, 거기 있어요? —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글자는 3초 만에 사라졌다. 하지만 그 온기는 남았다. 누군가의 손이 내 손바닥 안쪽에서 닿아 있는 것처럼.
누군가가 나를 찾고 있었다.
서른일곱 번의 계절 너머에서. 나를 아빠라고 부르는 누군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