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에서 온 나의 11살 아빠》

02화 2025년, 투명한 겨울의 아이

by Wren

1988년 철산동의 한 소년이 차가운 도덕산 비탈에서 칡뿌리를 캐며 세상을 향한 문을 두드리고 있을 무렵, 서른일곱 번의 계절이 강물처럼 흘러온 2025년의 겨울은 유난히 투명한 얼굴로 내게 찾아왔다.
회색빛 미세먼지에 익숙해진 도시 위로 오랫동안 잊혔던 본연의 푸른빛이 내려앉았고, 공기는 날 선 칼날처럼 차가우면서도 비어있는 방처럼 청아했다. 겨울이 이렇게 맑을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그해 처음으로 알았다. 맑은 것은 때로 슬픈 것과 닮아 있었다.
내 이름은 조하온. 올해로 열한 살이다.
나의 겨울방학은 빽빽한 학원 시간표가 아니라, 동쪽 창으로 길게 스며드는 아침 햇살의 각도로 시작된다. 부모님과의 약속 덕분이었다. 시험 점수가 평균 70점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다면, 방학이라는 시간의 주도권을 온전히 내게 넘겨주기로 한 계약. 그 약속은 내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자유를 선물했다.
하지만 나는 이따금 생각했다. 이 자유가 실은 세상으로부터 나를 격리하는 아주 얇은 유리벽일지도 모른다고. 유리는 투명하다. 안에서 밖이 보이고, 밖에서 안이 보인다. 그러나 서로에게 닿을 수는 없다.
아침 8시.
창밖 길모퉁이에는 노란색 학원 버스가 어김없이 멈춰 선다. 잠이 덜 깬 얼굴로 차에 오르는 친구들을 나는 빌라 3층 창문이라는 네모난 액자 속에서 가만히 내려다본다. 모두가 정해진 선로 위를 달리는 기차처럼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나 혼자만 인적 없는 간이역에 남겨진 기분.
그럴 때면 심장이 서늘해져 책상 위 아무 책이나 펼쳐놓고 주문처럼 속삭이곤 했다.
'괜찮아, 하온아. 너는 너만의 시간표를 여행하는 중이야.'
말이 주문이 되려면 여러 번 되풀이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그 겨울에 배웠다.
나의 세계가 이토록 고요한 데에는 엄마 유진이라는 섬이 있었다.
엄마는 공황장애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파도에 갇혀 지냈다. 우리는 남들처럼 비행기를 타거나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지 못했다. 인파 속에서 엄마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가던 그날 이후로 나는 다시는 멀리 가자고 조르지 않았다.
엄마의 세상이 좁다면, 나의 세상도 그만큼이면 충분하다고 믿었다. 그것이 사랑인지 체념인지, 열한 살의 나는 구분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 둘은 아직 어린 언어로는 같은 말인지도 몰랐다. 사랑은 때때로 포기처럼 생긴 얼굴을 하고 온다.
하지만 나의 겨울이 외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아빠 조운은 퇴근길에 커다란 플라스틱 눈썰매를 사 오곤 하셨다. 우리는 집 근처 아차산의 작은 언덕으로 향했다. 아빠가 뒤에서 힘껏 밀어줄 때,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와 아빠의 웃음소리가 뒤섞이며 나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로켓이 된 기분을 만끽했다.
눈밭에 누워 눈싸움을 하던 아빠의 장난기 어린 눈빛, 언덕 아래서 보온병을 들고 조용히 미소 짓던 엄마. 그 풍경은 내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걸어두고 싶은 단 하나의 그림이었다. 언젠가 세상이 너무 차가워지는 날, 꺼내 볼 수 있도록.
가끔 아빠는 아차산의 흙을 밟으며 혼잣말처럼 말씀하셨다.
"하온아, 아빠는 이맘때 도덕산에서 할머니랑 칡을 캤단다. 그때 흙냄새는 지금보다 훨씬 더 시렸어."
아빠가 말한 1988년의 철산동은 내가 가보지 못한 먼 나라의 이야기 같았다. 하지만 그 시절 아빠가 겪었을 추위가, 지금 내 손끝에 닿는 겨울바람과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추위는 시대를 가리지 않는다. 차가운 것은 언제나 차갑다. 그리고 손을 잡아주는 온기 또한, 언제나 같은 온도다.
나는 장갑 낀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빠는 그때 장갑도 없이 그 흙을 팠을까. 그 생각을 하자 손끝이 시린 것 같았다. 아직 겪어보지 않은 추위가 몸속 어딘가에서 기억되는 것처럼.
불안이 밀려오면 나는 방바닥에 레고 조각들을 쏟아냈다.
수천 개의 조각을 설명서 없이, 내 머릿속 설계도만으로 맞추다 보면 시간은 의미를 잃었다. 하나둘 완성된 로봇들은 책상 위에 나란히 서서 나를 지켜주는 든든한 군대가 되어주었다. 나는 그 군대의 유일한 사령관이었다. 적어도 이 방 안에서만큼은.
밤이 깊어지면 아빠가 방 문을 열고 들어와 진지하게 묻곤 하셨다.
"오, 오늘의 신작은 어떤 능력을 가졌지?"
"이 로봇은 '스텔스' 기능이 있어서 슬픔을 몰래 훔쳐 가요. 그리고 이쪽 팔 엔 '시간 역행 미사일'이 있어서, 딱 한 번 후회되는 순간으로 돌아가게 해 주죠."
아빠는 감탄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말이 농담인 줄 알았다. 아빠의 눈가에 스친 것이 웃음인지 그리움인지 구분하지 못한 채, 나는 그저 기뻐했다. 아빠의 따뜻한 인정이 나를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나의 방학은 고요하고 안전하게 흘러갔다.
하지만 나는 그때 알지 못했다. 그 평화로운 세계의 하늘에, 1988년 철산동의 밤하늘을 갈랐던 그 빛과 닮은 희미한 균열이 생겨나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균열의 시작이, 레고를 조립할 때마다 아주 가끔 이유 없이 저릿해 오던 나의 왼손 끝에서부터 비롯되고 있었다는 것을.
아빠가 1988년 밥상 아래에서 숨겨야 했던 그 왼손의 떨림이, 서른일곱 번의 계절을 건너 내 손끝에서 다시 깨어나고 있었다. 핏줄은 말하지 않은 것을 전달한다. 상처도, 온기도, 아직 오지 않은 만남도. 나는 그것을 아직 몰랐다.
다만 왼손이 저릿할 때마다, 심장 어딘가가 오래된 문처럼 삐걱거렸다. 그 문 너머에 누가 있는지,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그날 밤이었다.
레고 조각을 내려놓으려는 순간, 왼손이 갑자기 타오르듯 뜨거워졌다. 숨을 참았다. 손바닥을 뒤집어 보았다.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피부 아래에서 무언가가 빛나고 있었다. 숫자 같기도 했고, 글자 같기도 했다. 찰나였다. 3초도 되지 않아 사라졌다.
나는 그것을 아빠한테 말해야 할지 몰랐다. 말하면 아빠가 걱정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 빛이 나타난 순간 책상 위 낡은 사진틀 속 아빠의 어린 시절 사진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흔들린 것이 아니었다.
바뀐 것이었다.
분명히 혼자 웃고 있던 사진 속 열한 살의 아빠 옆에, 아무도 없던 자리에, 처음 보는 아이의 윤곽이 희미하게 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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