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에서 온 나의 11살 아빠》

06화 공황이라는 섬에 갇힌 엄마

by Wren

공책의 글자가 번지고 있었다.
창고 안이었다. 무릎을 꿇고 앉아 낡은 공책을 두 손으로 받쳐 든 채, 나는 숨도 쉬지 않았다. 아빠의 열한 살 글씨 옆으로, 지금 이 순간 누군가가 쓰고 있는 것처럼 한 글자씩, 천천히, 번져 나오고 있었다.
— 하온아. 너는 진짜 내 아들이니? 나보다 형 같은데 어떻게 내 아들이야? 그리고 그 사람이 왜 위험한 거야? 아직 늦지 않았어? —
나는 그 자리에서 울었다.
소리 없이. 창고 먼지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뒤섞인 그 공간에서, 열한 살짜리 아빠가 서른일곱 해 전에 떨리는 왼손으로 써 내려간 그 물음이 지금 내 손바닥 위에서 완성되고 있었다. 나보다 형 같은데 어떻게 내 아들이야. 그 문장이 우습기도 하고, 가슴이 먹먹하기도 했다. 열한 살 아빠는 아직 아빠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나는 그 아이에게 아빠라고 불리고 싶었다.
왼손이 뜨거웠다. 나는 공책을 가슴에 꼭 안았다.
응, 나 진짜 네 아들이야. 아빠.
소리 내어 말하지는 못했다. 엄마가 잠들어 있었다. 이 집에는 잠든 엄마를 깨우면 안 되는 밤이 있었다.
어떤 병은 사고처럼 찾아오고, 어떤 병은 안개처럼 스며든다.
엄마 유진에게 찾아온 병은 후자였다.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진 것이 아니었다. 서서히, 아주 조용히, 엄마의 세계가 좁아져 갔다. 엄마는 아주 작고 아름다운 섬에 갇힌 사람 같았다. 겉으로 보기엔 평화롭고 고요하지만, 섬 밖으로 한 발자국만 내디디면 숨이 막혀버리는 보이지 않는 경계 속에 사는 사람.
사람들은 그것을 공황장애라고 불렀지만, 내게 그것은 엄마를 세상으로부터 지켜주는 동시에 가두어버리는 투명한 감옥처럼 보였다. 투명하기 때문에 더 잔인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은 부수는 방법도 알 수 없었다.
딱 한 번, 엄마의 손을 잡고 백화점에 갔던 2학년 겨울의 기억이 있다.
크리스마스트리가 화려하게 빛나고 사람들이 파도처럼 밀려들던 그곳에서, 나는 엄마의 손이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 따뜻했던 손이었다. 내 손을 꼭 잡고 있던 손이었다. 그것이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엄마의 시선은 초점을 잃고 허공을 헤맸으며, 이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화려한 조명 아래서 엄마의 얼굴은 유령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사람들이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나는 엄마를 바라보는 그 시선들이 싫었다. 엄마가 아픈 것보다, 엄마가 그 시선을 받는 것이 더 아팠다.
"하온아, 미안해… 엄마가 숨이 안 쉬어져…."
엄마의 목소리는 실처럼 가늘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엄마의 손을 꼭 쥐었다. 뜨겁게 해주고 싶었다. 다시 따뜻해지도록.
그날 이후로 나는 다시는 사람 많은 곳에 가자고 조르지 않았다.
엄마는 미안하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다.
남들처럼 가족 여행 한 번 편히 못 가는 것, 하온이의 방학을 학원 버스 대신 집안의 고요함으로 채우게 만든 것이 모두 자신의 탓이라 여겼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엄마가 주방에서 정성껏 나물을 무치고, 내가 조립한 레고 로봇의 관절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여줄 때, 엄마는 자신의 섬 안에서 최선을 다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사랑이 크다고 해서 세상을 넓게 이동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엄마의 사랑은 좁은 곳에서 더 깊어지는 종류였다.
아빠 조운은 그런 엄마를 단 한 번도 재촉하지 않았다.
퇴근길에 늘 꽃 한 송이나 엄마가 좋아하는 간식을 사 들고 왔다. 그건 섬으로 보내는 아빠만의 작은 보급선이었다.
"유진아, 오늘은 날이 좋더라. 거실 창으로 들어오는 햇볕이 꼭 제주도 같아."
아빠의 그 능청스러운 농담에 엄마가 배시시 웃음을 터뜨릴 때, 우리 집의 거실은 정말로 이름 모를 남쪽 나라의 해변이 되었다.
나는 그런 아빠를 바라보다가, 오늘도 아빠의 왼 손목을 가만히 훔쳐보았다.
흉터가 있었다.
왼 손목 안쪽, 소매를 걷으면 드러나는 자리에, 오래된 화상 자국처럼 보이는 흉터가 있었다. 아빠는 그것에 대해 단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다. 내가 물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가끔 그 흉터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것이 1988년의 것인지, 아니면 그 이후의 것인지. 어떤 불이, 어떤 차가움이 이 자리에 닿았는지.
아빠의 왼손은 세상이 틀렸다고 말해온 손이었다. 그리고 그 손에,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상처가 새겨져 있었다.
그날 밤 나는 다시 창고로 향했다.
공책을 펼쳤다. 아빠의 왼손 글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왼손으로 연필을 쥐었다. 아빠처럼. 세상이 틀렸다고 말하더라도, 이 공책 안에서만큼은 가장 정직한 손으로 써야 했다.
급하게, 하지만 또렷하게 썼다.
— 아빠, 그 사람은 가짜예요. 백화점 담당자가 아니에요. 내일 아침에 할아버지가 돈을 찾으러 가실 거예요. 그걸 막아야 해요. 제발, 할아버지한테 말해줘요. 아직 늦지 않았어요. 이걸 막지 못하면 할아버지는—
그 순간이었다.
공책의 글자들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방금 내가 쓴 글자들이, 마치 물에 번지듯 희미해졌다. 왼손 끝의 온기가 갑자기 식었다. 무언가가 끊기는 느낌이었다. 신호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하온아?"
등 뒤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공책을 등 뒤로 감추며 돌아보았다. 엄마가 창고 문 앞에 서 있었다. 잠옷 차림이었다.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또 잠을 못 잔 밤이었다.
"여기서 뭐 해? 이 시간에."
엄마의 시선이 내 등 뒤를 향했다. 나는 공책을 더 깊이 감추었다. 심장이 뛰었다.
공책 안의 글자들이 다시 번지고 있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온기로 알 수 있었다. 아빠의 답장이 오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하지만 엄마가 보면 안 됐다. 아직은.
"엄마,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아빠 옛날 물건 보고 싶어서."
엄마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춥다. 들어가자."
나는 엄마의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언제나처럼. 나는 두 손으로 엄마의 손을 감쌌다. 뜨겁게 해주고 싶었다. 언제나처럼.
공책은 등 뒤에서 계속 뜨거웠다. 아빠의 답장이, 내가 읽지 못한 채로, 거기 새겨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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