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화 백화점 납품의 배신, 무너진 거인
— 아빠, 그 사람은 가짜예요. 내일 아침에 할아버지가 돈을 찾으러 가실 거예요. 그걸 막아야 해요. 할아버지는—
거기서 끊겼다.
나는 공책을 뒤집어보고, 흔들어보고, 손바닥으로 표지를 두드려보았다.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왼손의 온기도 식어 있었다. 연결이 끊긴 것처럼, 아니 누군가가 하온의 손을 잡아채 간 것처럼, 문장은 그 자리에서 멈춰버렸다.
할아버지는. 그 뒤에 무엇이 오는가.
나는 밤새 그 물음을 붙들고 있었다. 이불을 뒤집어써도 잠이 오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어떻게 된다는 걸까. 그 사람을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은 알겠는데, 막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걸까. 미래를 아는 누군가가 필사적으로 경고를 보내왔다. 그 필사적임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창밖이 서서히 밝아왔다. 나는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아침을 맞았다.
아버지는 여느 날보다 일찍 일어났다.
부엌에서 어머니의 인기척이 들렸다. 국 끓이는 소리, 찬장 여닫는 소리. 하지만 오늘 아침의 소리들은 달랐다. 평소보다 조심스러웠다.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조차 숨을 죽이는 것 같았다.
나는 방문 틈으로 내다보았다.
아버지가 아랫목에 앉아 낡은 서류 가방을 열고 있었다. 손때 묻은 갈색 가죽 가방이었다. 아버지가 마장동에 나갈 때 들고 다니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 가방 안에 들어가는 것은 장부나 서류가 아니었다. 두툼한 봉투였다. 하나, 둘, 셋. 아버지의 손이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봉투들을 가방 안에 넣었다.
어머니가 국그릇을 상에 올리며 말했다.
"여보, 한 번 더 확인해 봤어요? 그 사람 명함이라도…."
"괜찮아. 김 부장이 직접 소개해준 사람이야. 나 믿어."
아버지의 목소리는 단단했다. 의심의 여지를 주지 않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그 단단함이 두려움을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른들의 확신은 때로 불안을 포장한 이름이었다.
가방을 닫는 소리가 났다.
나는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섰다. 심장이 뛰었다. 지금 말해야 했다. 하온이 뭐라고 했는지 말해야 했다. 공책에서 글자가 왔다는 것, 그 사람이 가짜라는 것, 오늘 돈을 건네면 안 된다는 것.
하지만 어떻게 말한다는 말인가. 미래에서 온 내 아들이 공책을 통해 경고를 보냈다고? 열한 살 소년의 말을, 인생을 걸고 승부수를 띄운 아버지가 들어줄 리 없었다. 들어준다 해도, 믿어줄 리 없었다.
그래도 나는 방문을 열었다.
"아버지."
아버지가 가방을 들고 일어서며 돌아보았다. 그 눈빛은 이미 마장동을 향해 있었다.
"아버지, 오늘… 가지 마세요."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아버지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무슨 말이냐고 묻는 것도 아니고, 왜 그러느냐고 묻는 것도 아닌, 그냥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어머니가 부엌 입구에서 손을 멈췄다.
그때였다.
"정민 씨!"
대문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어젯밤 그 남자의 목소리였다. 너무 깨끗한 양복, 아무 냄새도 없던 손. 그가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
"차 대기시켜 놨어요. 오늘 백화점 바이어가 시간이 없다고 해서요. 서두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얼굴에 결의가 굳어졌다. 그는 가방을 다시 고쳐 쥐었다.
"조운아."
아버지가 내 이름을 불렀다.
"아버지 오늘 우리 가족 밥줄 뚫으러 간다. 집에서 어머니 도와드려라."
나는 아버지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려 했다. 손이 뻗었다. 하지만 그 순간 형 성훈이 골방 문을 열고 나오며 나와 아버지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아버지, 다녀오세요."
형의 한마디가 공기를 바꿨다. 가족의 배웅이 되어버렸다.
나는 뻗었던 손을 거두었다. 아버지는 이미 대문을 향해 걷고 있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장동에서 보았던 그 거인의 어깨였다. 날카롭고, 살아있고,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던 어깨.
제발, 돌아오세요.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온 것은 저녁이 되어서였다.
빈 가방을 들고.
나는 마당에서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모든 것을 알았다. 말이 필요 없었다. 마장동에서 보았던 그 살아있던 눈빛이 없었다. 꺼져 있었다.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꺼져버린 사람의 얼굴이었다.
어머니가 마당으로 뛰어나왔다.
"여보, 어떻게 됐어요?"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손이 아버지의 팔을 잡았다. 아버지는 그 손을 뿌리치지도 않고, 잡지도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빈 가방을 든 채. 오늘 아침 그 단단한 목소리로 '괜찮다'라고 말하던 사람이, 이제는 자신의 이름도 잊어버린 사람처럼 서 있었다.
빌린 돈까지 모두 들어간 가방이었다. 친척들에게 고개를 숙여 빌린 돈이었다. 마장동에서 손이 부르트도록 번 돈이었다. 그것이 오늘 오후의 어딘가에서,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백화점 담당자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말없이 안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쇠가 쇠에 걸리는 그 짧은소리가, 집 안 전체에 울렸다. 어머니는 문 앞에 서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손을 들어 문을 두드리려다, 멈추었다. 또 들었다가, 또 멈추었다.
형은 골방으로 들어갔다. 누나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저녁상은 차려지지 않았다.
집 안에 지독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른의 꿈이 무너지는 소리는 폭발이 아니었다. 이 침묵이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아무도 울지 않는, 아무것도 부서지지 않지만 모든 것이 이미 부서져버린 이 고요함이었다.
나는 마당 한가운데 혼자 서 있었다.
차가운 2월의 밤바람이 기와지붕 너머에서 불어왔다. 연탄가스 냄새가 났다. 어딘가에서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렸다. 세상은 아무것도 모른 채 계속되고 있었다.
밤이 깊어서야 나는 방으로 들어왔다.
공책을 펼쳤다.
하온의 글씨가 보고 싶었다. 이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왼손으로 써 내려간 그 유려한 글씨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그리운 것이었다.
나는 손을 멈췄다.
공책의 마지막 페이지가 찢겨 있었다.
하온이 마지막으로 쓰다 멈춘 그 페이지였다. 할아버지는—이라는 글자가 남아 있던 그 자리가, 날카롭게 뜯겨 있었다. 누가 뜯은 것이 아니었다. 안에서 터진 것처럼, 종이의 섬유가 흰 속살을 드러내며 갈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 찢어진 자리에, 갈색의 얼룩이 번져 있었다.
핏자국이었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언제 생긴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것은 선명했고, 아직 완전히 마르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얼룩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왼손이 뜨거워졌다. 아니, 타는 것 같았다.
안방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잠든 것인지, 깨어 있는 것인지, 아버지가 거기 있기는 한 것인지.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공책의 찢어진 페이지가 바람도 없는 방 안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할아버지는—
그 뒤에 이어져야 할 말이, 이제는 영영 닿지 않을 곳으로 떠내려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