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화 슬픔을 훔쳐가는 스텔스 로봇
처음에는 공기였다.
엄마와 함께 창고에서 나와 거실로 돌아온 그 순간, 뭔가 달라진 것을 느꼈다. 무엇이 달라졌는지 말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가구는 그대로였고, 불빛도 그대로였고, 엄마는 소파에 앉아 평소처럼 따뜻한 차를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었다. 하지만 공기의 무게가 달랐다. 조금 전보다 집 안이 무거워진 것 같았다. 마치 누군가 슬픈 소식을 가지고 들어와 문도 닫지 않고 나가버린 것처럼.
나는 거실 벽에 걸린 액자를 바라보았다.
아빠의 어린 시절 사진이었다. 언제 봐도 해맑게 웃고 있던 그 사진이었다. 그런데 오늘 밤, 그 안의 아빠가 웃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 웃고 있기는 한데, 눈이 달랐다. 사진 속 배경이 더 어두워진 것 같기도 했다. 아빠 뒤로 보이던 하늘이 분명히 낮이었는데, 지금은 저물녘처럼 보였다.
나는 눈을 비볐다. 다시 보았다. 사진은 그대로였다.
그런데 아빠의 표정만큼은, 확실히 더 지쳐 보였다.
창고로 다시 달려간 것은 엄마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였다.
공책을 펼쳤다. 그리고 숨이 멎었다.
할아버지는—이라는 글자 옆으로, 페이지가 찢겨 있었다. 내가 쓴 문장이 거기서 끊겼다. 종이의 흰 속살이 드러난 채 갈라진 그 자리에, 갈색 얼룩이 번져 있었다.
나는 공책을 들고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핏자국이었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언제 생긴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선명했다. 나는 그 얼룩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내가 경고를 다 전달하지 못한 그 자리에, 누군가의 피가 번져 있었다.
나 때문인가.
그 생각이 가슴을 파고드는 순간, 온몸이 차가워졌다.
내가 창고 문을 너무 늦게 열었기 때문인가. 엄마가 불러서 공책을 덮어버렸기 때문인가. 경고를 다 쓰기 전에 신호가 끊겼기 때문인가. 나 때문에 할아버지가, 1988년의 그 밤에, 무언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겪게 된 건 아닐까.
열한 살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물음이었다.
하지만 이미 알아버렸다. 그리고 안 것들은, 다시 모를 수 없었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레고 상자를 열었다.
불안이 밀려올 때 언제나 그랬듯이. 수천 개의 조각이 방바닥에 쏟아지는 소리가 좋았다. 그 소리는 흩어지는 소리이기도 하고, 동시에 시작되는 소리이기도 했다. 무언가를 부수는 것이 아니라 펼치는 소리.
오늘 만들 것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스텔스. 슬픔을 몰래 훔쳐가는 로봇.
아빠에게 처음 그 이야기를 했을 때 아빠의 눈가에 스친 그 표정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웃음인지 그리움인지 알 수 없던 그 얼굴. 그때는 그냥 아빠가 감탄해 주는 줄만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아빠에게는 훔쳐가야 할 슬픔이 있었다. 1988년부터 시작된, 아직 끝나지 않은 슬픔이.
내가 그것을 가져올 수 있다면.
조각을 맞추기 시작했다. 왼손이 먼저 움직였다. 아빠처럼. 세상이 틀렸다고 말해온 그 손이, 오늘 밤은 가장 정확하게 조각을 찾아냈다. 하나가 맞춰지면 다음 하나가 보였다. 설명서 없이, 오직 머릿속 설계도만으로. 슬픔을 품을 수 있을 만큼 가슴이 넓어야 했다. 온몸이 투명해서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가벼워야 했다. 그리고 한 번도 지치지 않을 만큼, 아주 단단해야 했다.
나는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조각을 맞추었다.
현관문이 열린 것은 자정이 가까울 무렵이었다.
아빠였다. 오늘은 야근이 있다고 했었다. 나는 레고 조각을 내려놓고 귀를 세웠다.
발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아빠는 집에 돌아오면 늘 거실을 가로질러 먼저 내 방 문을 살짝 열어보곤 했다. 오늘도 그랬다. 문틈으로 빛이 새어 들어왔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내가 방문을 열고 나갔을 때, 아빠는 부엌 식탁에 앉아 왼 손목을 오른손으로 쥐고 있었다.
그냥 쥐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누르고 있었다. 흉터가 있는 그 자리를. 눈을 감고, 미간을 좁히고, 통증을 참는 사람의 얼굴로.
"아빠."
아빠가 눈을 떴다. 얼른 손을 내렸다.
"하온아, 안 자고 있었어?"
"스텔스 만들고 있었어요."
아빠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눈가가 무거웠다. 오늘 아빠는 어디선가 아주 오래된 것을 다시 만지다 온 사람 같았다.
"다 됐어?"
"거의요. 가슴 부분이 남았어요."
아빠는 의자에서 일어나 내 옆에 앉았다. 왼 손목은 더 이상 만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보았다. 흉터 위로 아주 얇은 붉음이 번져 있는 것을. 오늘 밤, 그것이 살아난 것을.
1988년의 그 밤 때문이야.
나는 아빠에게 말하지 않았다. 말할 수 없었다. 대신 아빠의 목을 팔로 꼭 껴안았다. 아빠의 넓은 등이 내 얼굴을 감쌌다. 여기에 기대면 언제나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 냄새가 났다. 뽑히지 않는 나무.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서도 버텨온 나무.
그 나무가, 오늘 밤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빠, 많이 힘들어요?"
아빠는 잠시 침묵했다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 우리 하온이 곁에 있으면 하나도 안 힘들어."
거짓말인지 진심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였을 것이다.
아빠가 잠든 뒤, 나는 다시 레고 조각 앞에 앉았다.
스텔스의 가슴 부분이 비어 있었다. 슬픔을 담아두는 자리. 나는 품고 있던 것을 꺼냈다. 창고에서 가져온 찢긴 공책 조각이었다. 할아버지는—이라는 글자가 남아 있는 그 조각. 핏자국이 번진 그 조각.
나는 그것을 스텔스의 가슴 안쪽에 조심스럽게 접어 넣었다. 그리고 마지막 조각으로 가슴을 닫았다.
네가 가지고 있어. 내가 되찾아올 때까지.
그 순간이었다.
스텔스의 눈에서 붉은빛이 들어왔다.
나는 손을 멈추었다. 심장이 뛰었다. 배터리도 없고, 전자 부품도 넣지 않은 순수한 레고 조각으로만 만든 로봇이었다. 그런데 눈이 빛나고 있었다. 아주 작게, 하지만 분명하게.
그리고 들렸다.
소리가.
어디서 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스텔스에서 나는 것인지, 창밖에서 나는 것인지, 아니면 내 머릿속 가장 깊은 곳에서 나는 것인지.
소년의 흐느낌이었다.
1988년의 제기동에서, 안방 문이 잠기고 집 안에 지독한 침묵이 내려앉은 그 밤에, 공책의 페이지가 찢겨나간 채 홀로 마당에 서 있던 소년의 울음이었다. 소리를 죽인 울음이었다. 아무도 듣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누군가에게 닿기를 바라는 울음이었다.
나는 스텔스를 두 손으로 감쌌다.
"들려, 아빠. 나 여기 있어."
방 안이 조용해졌다. 붉은빛이 천천히 꺼졌다. 하지만 손바닥에는 온기가 남았다. 그 온기가 사라지지 않는 동안, 나는 눈을 감고 아빠의 열한 살을 향해 계속 말했다.
괜찮아. 너는 혼자가 아니야. 서른일곱 해 뒤에, 네가 만들어준 아이가 여기서 너를 기다리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