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에서 온 나의 11살 아빠>

제31화 제주도, 태어나서 처음 본 바다

by Wren


부모님 집은 성인 조운이 자란 동네에 있었다.
제기동과 가까운 곳이었다. 낮은 건물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열한 살 조운은 차 창문으로 그 골목들을 보았다. 낯설었다. 하지만 어딘가 알 것 같았다. 연탄 냄새는 없었다. 하지만 골목의 모양이 비슷했다. 이 동네가 1988년의 제기동이 나이를 먹으면 이렇게 되는 것 같았다.
성훈이 벨을 눌렀다. 안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한 걸음씩. 천천히.
문이 열렸다.
칠십 대 여자였다. 흰 머리카락이었다. 얼굴에 주름이 깊었다. 손이 마르고 작았다.
그런데 그 눈이.
열한 살 조운이 멈추었다.
그 눈의 모양이 낯설지 않았다. 매일 아침밥을 차려주던 사람의 눈이었다. 지금 제기동에 있는 그 사람의 눈이었다.
엄마였다.
엄마도 멈추었다. 그러고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조운아."
목소리가 떨렸다. 그것뿐이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엄마가 천천히 다가왔다. 무릎이 약간 흔들렸다. 열한 살 조운 앞에 서서 그 얼굴을 오래 보았다. 손을 들었다. 뺨에 닿았다.
차가웠다. 엄마의 손이. 이 손이 37년이 지나 이렇게 차가워졌다.
"맞아."
엄마가 말했다. 울지 않으려고 했다. 입술이 떨렸다.
"맞아. 우리 조운이야."
그러고는 울었다.
열한 살 조운은 그 울음을 들었다. 어젯밤까지 제기동에 있었다. 어젯밤의 엄마는 아직 젊었다. 밥을 차리고 잔소리를 하고 걱정을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37년이 지나 지금 자신 앞에서 울고 있었다.
열한 살 조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엄마."
그 한 마디만 나왔다.
"왜 이렇게 늙었어."
엄마가 더 크게 울었다. 그러고는 열한 살 조운을 껴안았다. 이 작은 몸을. 37년 전에 마지막으로 안았던 이 몸을. 엄마의 등이 흔들렸다. 멈추지 않았다.
성훈이 눈을 감았다. 조수현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온이 고개를 숙였다. 성인 조운은 현관 기둥에 기대어 벽을 보고 있었다. 눈물이 나려고 했다. 참았다.
안에서 지팡이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한 걸음씩.
아버지였다.
칠십 대 남자였다.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허리가 약간 굽어 있었다. 머리카락이 다 셌다. 얼굴이 많이 야위어 있었다. 그런데 그 코의 모양이. 그 눈썹의 각도가. 낯설지 않았다.
아버지가 현관에 서서 열한 살 조운을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동안.
그러고는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다시 움직였다.
"조운아."
목소리가 갈라졌다.
열한 살 조운이 아버지를 보았다. 1988년의 아버지는 병원 침대에 있었다.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 몰랐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지금 지팡이를 짚고 자신 앞에 서 있었다.
살아있었다.
열한 살 조운이 아버지에게로 걸어갔다. 아버지가 지팡이를 짚은 채 한 팔을 벌렸다. 열한 살 조운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가벼웠다. 아버지가. 이 품이 37년이 지나 이렇게 가벼워졌다. 뼈만 남은 것 같았다. 그런데도 따뜻했다. 이 따뜻함만큼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버지가 무너졌다. 소리 없이. 몸이 흔들렸다. 그러고는 열한 살 조운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아들보다 작아진 아버지가 울고 있었다.
거실이 조용해졌다.
한동안 아무 소리도 없었다. 울음소리도 없었다. 다들 숨을 참고 있었다.
창밖에서 바람 소리만 들렸다.
조수현이 먼저 부엌으로 갔다. 성훈이 아버지 옆에 앉았다. 성인 조운은 문 옆에 서 있었다. 하온이 열한 살 조운 옆에 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옆에 있었다.
엄마가 부엌에서 뭔가를 끓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만이 들렸다. 그 소리가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1988년에도 그 소리가 들렸으니까.
저녁을 먹었다. 온 가족이 처음으로 같은 식탁에 앉았다. 열한 살 조운. 성인 조운. 하온. 아버지. 엄마. 성훈. 성훈 배우자와 자녀. 조수현. 오래전에 흩어졌던 사람들이 한 상에 모였다. 말이 많지 않았다. 그냥 먹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밤에 열한 살 조운은 잠들지 못했다. 아버지 방에서 숨소리가 들렸다. 고른 숨소리였다. 살아있는 숨소리였다. 열한 살 조운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 눈을 감았다. 천장을 보았다. 1988년의 천장과 달랐다. 얼룩이 없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 숨소리만 들리면 됐다.
다음 날 아침, 아버지가 먼저 일어나 있었다. 마당에 서서 하늘을 보고 있었다. 지팡이를 짚고.
열한 살 조운이 마당으로 나갔다. 아버지 옆에 섰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먼저 말했다.
"바다 보고 싶냐."
열한 살 조운이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응."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보러 가자."
비행기가 구름 위를 날고 있었다. 열한 살 조운은 창문에 얼굴을 붙이고 아래를 보았다. 하얀 구름만 있었다. 그 아래 어딘가에 서울이 있었다. 제기동이 있었다. 1988년이 있었다. 그것들이 지금 이 구름 아래에 있었다.
하온이 옆에서 말했다.
"저기 봐요. 저 아래 어딘가가 제주도예요."
열한 살 조운이 더 바짝 창문에 붙었다.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구름만 있었다. 하지만 있었다. 거기 어딘가에. 아직 보지 못한 바다가.
아버지가 통로 건너편에 앉아 있었다. 지팡이를 무릎에 세우고. 창밖을 보고 있었다. 구름 위의 아버지였다.

비행기가 착륙했다.
공항 문이 열리자 바람이 들어왔다. 따뜻했다. 서울과 달랐다.
차를 타고 한참을 갔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돌담이 지나갔다. 낮은 집들이 지나갔다. 바다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차가 멈췄다.
성훈이 먼저 내렸다.
아버지가 지팡이를 짚고 내렸다.
열한 살 조운이 마지막으로 내렸다.
조금 걸었다.
바다가 갑자기 나타났다.
열한 살 조운이 멈추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하늘과 물이 이어져 있었다.
파도 소리가 들렸다.
열한 살 조운이 신발을 벗었다.
모래를 밟았다.
천천히 물가로 걸어갔다.
파도가 발등에 닿았다.
열한 살 조운이 말했다.
"차갑다."
아버지가 옆에서 웃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람이 불었다.
열한 살 조운은 오래 바다를 보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본 바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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