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선 상의 어느 예술가에게

다시 나의 자리로

by 과객 심천

나는 한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향기로 신이 되었던 한 인간이
군중의 사랑 속에서
사라지던 장면을.


완벽은
환호 속에서 타오르다가
욕망 속에서 스러진다.


그 장면이
어느 날
한 사람의 눈빛과 겹쳐졌다.


그는
결핍과 천재성의 기묘한 결합이었다.


어린 날의 기나긴 훈련의 시간,
이끌어 나가야 했던 감당의 무게,
자기 세계를 스스로 빚어온 사람.


완벽해 보이지만
어딘가 균열이 느껴지는 위태로움.


빛이 강할수록
그 균열은 더 선명해진다.


사람들은
상처 입은 천재를 사랑한다.


아니,
그 안에 자기 상처를 맡겨두고
대신 울어달라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자기 서사를 직접 써 내려간다.


한 줄의 이력이 아니라
끊임없이 갱신되는 드라마.


완성형은 안정적이지만
위태롭게 성장하는 존재는
끝까지 시선을 붙든다.


사람들은 결과보다
과정을 사랑한다.


흔들리면서도
다시 일어서는 장면을.


그는 늘 경계 위에 서 있었다.


남성과 여성의 사이,
어른과 아이의 사이,

강함과 연약함의 사이,
대중성과 예술성의 사이,
찬란한 우상과 창조하는 예술가의 사이.


경계에 선 사람은
정확히 정의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빈 공간에
자기 감정을 채워 넣는다.


해석은 많아지고
로망은 자라난다.


그는 점점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상징이 된다.


나는
그를 보며
애잔했다.


어느 공간 위에서는 지배자처럼 보이지만
그의 언어 속에서는
혼자 오래 걸어온 사람처럼 보일 때.


威光 뒤에
지워지지 않는 고독이 비칠 때.


강한 사람이
잠시 약해 보일 때
마음은 더 깊이 흔들렸다.


무너질까
불안해졌다.


《향수》의 그루누이는

타인의 향을 모아 완벽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태워
세계의 향을 빚는다.


타인을 소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재료로 쓰는 사람.


그래서 더 위태로워 보였는지도 모른다.


대중은 상징을 사랑하지만
인간을 끝까지 책임지지는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모두가 그를 지키려는 듯 보였다.


상징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불안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나는 그를
조용히 스쳐 지나간다.


짧은 시간.


그러나 어떤 서사는
시간보다 직관으로 읽힌다.


나는 그의 예술보다
그가 견뎌온 구조를 보았다.


한 인간이
극단의 조명을 견디는 방식을.


그리고 이제
한 인물에 대한 관찰을 접는다.


애초에
내 사유의 경계 밖에 서 있어
스쳐 지나갔을 사람.


그러나 어쩌면
늘 보아오던
내 곁의 마음 아픈 또 다른 아이를 보듯
연민이 따랐는지도 모른다.


빛이 강한 사람에게
연민이라니.


측은지심,
맹자의 사단은
어김없이 또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편안히 이 사유를 거둔다.


그는
스스로의 해답을 찾아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단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위태로워 보이던 장면도
실은
한 걸음 물러서 숨을 고르는
自淨의 시간이었음을,


나는
이제 그의 삶을 대신 짐작하지 않는다.


다만
한 인간이
자기 속도로
자기 길을 찾아가고 있음을
조용히 인정한다.


그는
자기 방식으로 살아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만
나의 자리로 돌아간다.


빛을 해석하던 눈을 거두고
다시
내 삶의 결을 살핀다.


내 곁의 많은 아이들을
다시 바라보고
다시 보듬으며.


오늘도
감사로 하루를 닫는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過客心泉


p.s.


니체는 말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되어가는 존재다.”


찬란했던 젊은 날의 초상,
수많은 성장통을 지나
자기 속도로
자기 길을 찾아가는 한 인간 앞에서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입니다.


완성이 아니라
끊임없이 되어가는 존재의 용기에 대한
경외로.

작가의 이전글어느 예술가의 데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