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빛 감 한 개가 내 마음에 계절을 물들였다.
주홍빛 침묵
엄마가 감 한 개를 건넨 그 순간, 나는 문득 시간의 흐름을 깨달았다.
"감나무집이 준 거야. 이제야 제대로 익었지."
엄마의 웃음과 함께 손에 들린 주홍빛 감은 단순한 과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느새 깊숙이 다가온 가을의 침묵이었고, 내가 마음의 여유를 잃고 놓쳐버린 계절의 엄중한 신호였다.
매일 지나치던 이웃집 감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줄도 모르고 지냈다니. 바빠서가 아니었다. 하늘을 올려다볼 틈도, 나무의 변화를 지켜볼 여유도 없었던 건,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마음이 없었던 탓이다. 왜 그렇게 삶을 분주함 속에 방치해 두었을까. 문득, 알 수 없는 서글픔이 밀려왔다.
흐릿해진 계절의 색
이 서글픔은 나이가 들면서 더 깊어졌다. 예전 같았으면 봄꽃을 보며 설레고, 여름의 녹음 속에서 생동감을 느꼈을 텐데. 이제는 계절의 변화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느끼는 감수성이 흐릿해진 것 같다.
호르몬의 변화 탓일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삶의 무게가 켜켜이 쌓여 만든 자연스러운 둔감함일 것이다. 사계절이 변함없이 선물하는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다는 건, 결국 소중한 현재를 음미하지 못하고 흘려보낸다는 의미다.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예전처럼 세심하게 주변을 관찰하지 못하는 아쉬움, 무언가를 계속해서 놓치고 있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겹겹이 쌓여 내 안의 계절을 멈추게 했다.
감의 통증, 익어가는 성숙
나는 감을 깎아 천천히 입에 넣었다.
풋풋했던 단맛이 이내 농밀하게 응축된 가을의 깊은 풍요로움으로 입안 가득 퍼졌다. 혀끝으로 느껴지는 쫀득한 질감과, 코로 스미는 은은한 향. 이 작은 열매 하나가 뜨거운 햇볕과 가뭄, 혹독했던 시간을 침묵하며 버텨낸 결과라는 것을 깨닫는다.
어마는 감을 건네며 짧게 덧붙이셨다.
"너도 이제야 제대로 물이 드는 거지. 세월이란 다 그런 거야."
그 말에 문득 깨달았다. 감나무가 견디며 익었듯, 지금 겪는 이 서글픔 또한 내가 삶의 다음 단계로 익어가고 있는 성숙의 통증일 것이다. 계절은 변함없이 돌아오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음미하는 내 마음의 자세는 이제 달려져야 했다.
이미 곁에 있던 아름다움
이제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 화려하고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곁에 숨 쉬고 있던 소중한 아름다움을 다시 발견하는 것.
바쁜 일상 속에서도 잠시 고개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나무의 미세한 변화를 눈여겨보며, 흐르는 시간을 '소중한 현재'로 붙잡아 두는 삶. 감 한 개가 전해준 깨달음을 마음 깊이 간직하며, 둔감해진 마음을 다시 계절에 열어본다.
따뜻하게, 그리고 깊이 있게 물들어가는 감처럼, 나 또한 그렇게 성숙한 가을의 색을 닮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