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리쿠기엔 6경 - 웅크린 용, 코끼리의 휴식 '와룡석(臥龍石)’
나그네에게 나아갈 길을 일러준다는 다정한 이름의 언덕, '시루베노오카(指南岡)'에서 잠시 발길을 멈춘다. 리쿠기엔의 심장인 대샘물(大泉水)은 제 몸을 넓게 펼쳐 하늘의 빛을 오롯이 비추느라 여념이 없다. 그 평온한 질서를 가로지르며 낮게 자리 잡은 묘한 바위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리쿠기엔 88경 중 하나인 ‘와룡석(臥龍石)’이다.
에도(江戸, 지금의 도쿄) 한복판에 와카(和歌, 일본 전통시)의 성지인 ‘와카노우라’를 옮겨오고 싶어했던 야나기사와 요시야스는 와카의 신을 모시는 ‘다마쓰시마 신사(玉津嶋神社)’의 신령한 이미지마저 이 곳에 재현해 놓았다.
一社壇前漫莫拜 (일사단전만막배) 사당의 단 앞에서 부질없이 절하지 마라
枕頭高臥両蒼龍 (침두고와양창룡) 베갯머리에 두 마리 푸른 용이 높이 누워 있노니.
그는 이 바위에 이 신성한 장소의 ‘수호신’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긴 셈이다. 세상도 그 뜻을 받들어 이 바위를 ‘웅크린 용’이라 부르며 경외심을 표해왔다. 실제로 바위 표면의 거친 요철은 빛의 각도에 따라 용의 검푸른 비늘처럼 번득이고, 수면 위로 낮게 솟은 곡선은 금방이라도 승천할 듯하다,
하지만 사람들의 경외심을 잠시 내려놓고, 짐짓 딴청을 피우며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내 눈에는 전혀 다른 형상이 겹쳐 보인다. 그것은 박제된 신화 속의 용이 아니라, 아기 코끼리 한 마리가 목을 축이는 모습이다.
와룡석이 이 정원의 ‘공식적인 이름’이라면, 내가 발견한 ‘코끼리 바위’는 이 공간이 내게 건네는 ‘사적인 농담’이다. 용은 구름을 부르고 비를 내리며 세상을 호령해야 하지만, 내 눈앞의 코끼리는 소리없이 나른한 오후의 갈증을 해소하고 있을 뿐이다. 신성한 비늘로 보였던 바위의 틈새는 코끼리의 주름진 가죽처럼 정겹고, 물속으로 깊게 가라앉은 바위의 끝자락은 갈증을 해소하려 밀어 넣은 코끼리의 코처럼 느껴져 슬며시 웃음이 난다.
왜 굳이 용이어야만 했을까. 옛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힘을 숭상하며 바위에 거창한 이름을 붙여두었지만, 가끔은 그 이름의 무게가 눈앞의 귀여운 본질을 가리기도 한다. 나는 오늘 이곳에서 위엄 넘치는 전설 대신, 물가에서 휴식을 취하는 코가 기다란 친구 하나를 만난다. 웅크린 용의 ‘기다림’보다, 목을 축이는 코끼리의 ‘충족감’이 지금의 내 산책에는 더 필요했나 보다.
수백 년이 흐른 지금, 리쿠기엔의 푸른 용은 소나무 깃발을 등에 얹고 노는 아기 코끼리가 되어 봄날의 오후를 즐기고 있다. 만든 이의 치밀한 설계와 보는 이의 유쾌한 오해가 만나 새로운 리쿠기엔의 풍경 하나가 만들어진다. 나는 다시 걷기 시작한다. 내 마음속에는 용의 포효 대신, 코끼리가 내뱉는 깊고 평온한 숨소리가 잔물결이 되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