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오는 철막의 보관함에서 불꽃망치를 끄집어내 잠시 들여다보았다. 이 불꽃망치의 비결을 풀었다면 오늘날 이런 참극은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제가 철막을 지키지 못하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다시 돌아와 마루치의 유업을 계승하겠습니다.’
무쇠 할배가 연오의 등을 두드렸다. 할배는 근오지의 장로답게 위급한 상황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후계자를 다독이며 현명하게 이끌었다.
철막에서 구름산까지는 대로를 피하고 지름길을 이용하기로 했다. 소나무 숲을 지나고 오천 시내를 건너 암벽을 타고 오르는 길이었다.
연오와 쇠불아비들은 망치, 철퇴, 쇠몽둥이로 무장하고 구름산으로 달려갔다. 세오는 태산이 업고 뛰었다. 모두 20여 명이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도망길에 올랐다.
그들이 좁은 암벽길 입구에 이르렀을 때였다. 뒤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울리며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두두리가 어느새 지척까지 쫓아온 것이다.
세오가 태산에게 내려달라고 하더니 입구에 우뚝 섰다. 손에는 은장도를 꼭 쥐고 있었다. 연오 일행을 보내고 혼자서 입구를 막으려는 것이었다.
연오가 깜짝 놀라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부부의 연을 맺은 정인을 두고 길을 떠날 수는 없었다. 그러자 세오는 칼을 뽑아 자기 목에 갖다 댔다.
“날 두고 떠나. 안 그러면….”
“어떻게 그래? 내가 널 지킬 거야. 같이 가자.”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젓고 그렁그렁한 눈으로 낭군을 올려다보았다.
“이 정도 거리에서 추격을 따돌릴 순 없어. 내가 여기서 어떻게 해볼 테니 어서 가. 우리 아버지가 대신관의 협력자니 저들도 날 해치지는 못할 거야.”
“하지만….”
연오가 머뭇거리자 세오는 힘주어 말했다.
“너는 운명을 찾아 떠나야 해. 내가 봤어. 삼족오가 저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날아가는 걸 봤다고. 해가 돋는 곳에 너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어. 가서 마루치의 일을 해.”
평소 말이 없는 태산도 곁에서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지금은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연오는 정인의 고운 손을 어루만지고는 살포시 놓아주었다.
“우린 꼭 다시 만날 거야. 그날까지 안녕히….”
세오는 돌아서서 멀어져 가는 연오의 등을 쓸쓸히 바라보았다. 차마 떼기 힘든 발걸음일 테지만 부러 씩씩하게 나아가고 있다.
연오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세오는 왼손을 펴서 낭군이 쥐여 준 정표를 들여다보았다. 빙옥을 깎아서 정성껏 연마한 구슬이다. 표면에는 한자로 ‘월정(月精)’, 두 글자를 새겼다.
세오를 위해 ‘달의 정령’을 남겨두고 ‘해의 정령’ 삼족오는 이제 동녘 하늘로 날아오를 것이다.
일각도 지나지 않아 귀섬이 두두리를 이끌고 암벽길 입구에 나타났다. 세오는 하얀 목에 칼끝을 대고 말했다.
“거기서 한 발짝도 떼지 말거라. 다가오면 내 목을 찌를 것이다.”
귀섬은 휘하 전사들에게 즉각 멈추라는 명을 내렸다. 그는 이 계집이 천군의 딸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주군인 석벌휴도 지밀 공자의 배필로 점찍었다. 상하게 해서는 곤란하다.
그럼 어쩐다? 연오와 그 일파를 제거하지 못하면 이 작전은 실패다. 석벌휴도 서늘하게 나오겠지만 준오는 펄펄 뛸 것이 분명하다.
“아가씨 그러다 다칩니다. 칼 내려놓으세요. 어서….”
귀섬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세오는 칼끝으로 목 옆쪽을 살짝 찔렀다. 한 줄기 선홍빛 피가 목에서 흘러내려 쇄골을 적셨다.
‘이 계집 독종이군.’
그는 혀를 내두르며 간자를 불렀다. 읍성에 들어가서 준오를 데려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근오지 복색을 한 간자는 지체 없이 말을 타고 출발했다.
귀섬으로선 그나마 다행인 게 실패 원인이 될 자가 천군의 딸이라는 사실이다. 제 여식이 그르친 일을 가지고 누구 책임을 묻기는 어려울 것이다.
세오가 귀섬과 대치하는 동안 연오 일행은 급히 산을 넘고 있었다.
“구름산 요새로 사람을 보내 우리 전사들에게 알리는 게 어떨까요?”
연오의 신중한 물음에 무쇠 할배는 손사래를 쳤다.
“두두리가 아무런 제지도 없이 치소에 나타났네. 요새에서 협력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 아마도 수비대장 활보가 천군과 붙어먹었겠지.”
지극히 합당한 통찰이다. 연오는 곧바로 수긍하고 다음 행보를 의논했다. 무쇠 할배는 구름산을 넘어 도기야 포구로 도망가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곳은 교역선이 드나드는 곳이다. 물길을 이용해 후일을 도모하기에 적합하다. 연오는 할배의 의견에 동의하고 도기야로 넘어갈 길을 찾았다.
능선을 타는 넓은 길은 요새에서 순찰하고 있으므로 피해야 한다. 그렇다면 해맞이봉 아래로 나 있는 좁고 위험한 벼랑길로 갈 수밖에 없다.
쇠불아비들은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산길을 거침없이 헤쳐 나갔다. 무쇠 할배도 노익장을 과시하며 잘 따라붙었다.
해맞이봉을 넘어 벼랑길을 조심조심 내려가고 있을 때였다. 신기하게도 연오의 등에 있던 불꽃망치가 웅웅거리며 낮게 울렸다.
무쇠 할배가 귀를 갖다 대더니 불꽃망치와 감응하는 물건이 부근에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마침 벼랑 한 모퉁이에 굴이 보였다.
연오가 불꽃망치를 둘러맨 채 굴속으로 들어갔다. 냄새로 보아 곰이 동면하는 굴이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울림은 더욱 커졌다.
깊은 어둠 속에 흐릿한 형체가 어른거렸다. 먼지로 뒤덮인 상자였다. 뚜껑을 열어보니 낡은 목간이 있었다. 연오는 그걸 꺼내 들고 동굴 밖으로 나왔다.
쇠불아비들이 야영을 준비하는 동안 연오는 목간을 훑어보았다. 겉면에 삼족오 문양이 찍혀 있다. 놀랍게도 불꽃망치에 새겨진 것과 똑같다.
목간은 초대 마루치 대오가 남긴 비급(祕笈), ‘불꽃의 연금술’이었다. 마루치가 대를 이어 구전해 온 비결의 원본이 해맞이봉 벼랑길에 있었다.
천상의 철기는 본래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가 창시한 것이라고 한다.
아득히 먼 옛날 해모수는 오룡거(五龍車,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지상에 강림했다. 머리에 오우관(烏羽冠, 까마귀 깃털 관)을 쓰고 허리에는 용광검(龍光劍)을 찬 삼족오의 화신이었다.
두만강 유역의 대장장이들에게 해모수는 불꽃의 연금술을 전수했다. 초대 마루치 대오는 그 비결을 불꽃망치와 목간에 담아 후손들에게 남겼다.
제련과 단야와 성형의 원리는 불꽃망치에 그림으로 새겨넣고, 세밀한 기술과 특수처리 등의 비법은 목간에 한자로 적어놓은 것이다.
연오는 문득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굳이 한자를 가르쳤다. 하기 싫은 공부였다. 대장장이에게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것을 강요한다고 어린 마음에 툴툴거렸다.
목간을 읽다가 연오는 울컥하고 말았다. 아, 비급 때문이었구나. 아버지는 아들이 훌륭한 마루치가 되기를 바라며 자질을 길러주려고 했다.
벅찬 가슴을 부여잡고 그는 목간을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나갔다. 마지막 부분에 이상한 글귀가 보였다. 그것은 연금술이 아닌 예언 같았다.
“동쪽 하늘을 가로질러 세 발 까마귀가 현신하고, 둥둥 바위는 미완의 마루치를 해가 돋는 땅으로 인도하리라. 새로운 삶은 죽음 너머에, 희망의 빛은 어둠 저편에, 내일의 태양은 바다 건너에 있네.”
연오는 직관적으로 깨달았다. 미완의 마루치는 바로 나다. 선조들이 해모수의 권능으로 내가 갈 길을 일러준 것이다.
구름과 안개가 걷히고 비로소 예언의 길이 열렸다. 나는 이제 해가 돋는 땅으로 가리라. 불꽃의 연금술을 갈고 닦아 천상의 철기를 완성하리라.
그는 목간을 소매에 넣고 바위에 기대 눈을 붙였다. 잠을 청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
결국 한숨도 자지 못하고 먼 동이 틀 무렵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연오는 나는 듯한 발걸음으로 벼랑길을 내려갔다. 무쇠 할배와 대장장이들이 그를 따랐다.
도기야 바닷가에 이르자 태양이 이글거리며 말간 얼굴을 내밀었다. 환하게 밝아오는 동녘 하늘을 향해 연오는 불꽃망치를 한 번, 두 번, 세 번 힘껏 휘둘렀다.
불꽃망치의 삼족오가 햇빛을 받으면서 퍼덕퍼덕 날아올랐다.
그때 수평선 아래에서 새하얀 돛이 둥실 떠올랐다. 교역선 한 척이 파도를 타고 빠르게 다가왔다. 널찍한 바위처럼 생긴 왜의 배, 천반선(天磐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