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미코는 본래 남해도 야마타이의 해녀였다.
병든 아버지를 부양하려고 소녀는 날마다 물질을 나갔다. 물속에서 히미코가 애타게 찾은 것은 문어였다. 아버지 기력을 회복하는 데는 문어죽이 특효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히미코는 바다에 들어갔다가 역류한 급물살에 휩쓸렸다.
해녀들이 종종 겪는 일이었다. 소녀는 발버둥치지 않고 침착하게 물살에 몸을 실었다. 숨을 참다가 흐름이 끝나는 지점에서 수면 위로 올라갈 생각이었다.
이윽고 물살이 순해지고 소녀가 솟구치려는 순간 무언가 발목을 잡았다. 아래를 보니 바위틈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대왕문어가 촉수를 뻗어 붙잡은 것이었다.
커다란 문어의 빨판은 흡착력이 엄청나 떼어내기 힘들다. 발로 차고 칼로 찔렀지만 놔주지 않았다. 히미코의 작은 몸은 어쩔 도리 없이 밑으로 끌려 내려갔다.
모랫바닥에 닿자 위장하고 있던 적갈색 촉수들이 한꺼번에 덮쳤다. 소녀의 팔다리를 꽁꽁 묶더니 온몸을 휘감아 조였다.
히미코는 몸부림치다가 숨이 막혀 혼절하고 말았다. 아득한 정신은 붕 떠서 흩어지더니 시커먼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렴풋한 형체가 어른거리고 주문 외우는 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 속삭이며 소녀를 깨웠다. 눈을 떠보니 문어는 온데간데없고 혼자 깜깜한 동굴 안에 누워 있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지만 히미코는 안간힘을 다해 몸을 일으켰다. 어서 아버지에게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파도가 암벽을 깎아 만든 바다 동굴이었다. 찰랑찰랑 물소리가 났다. 히미코는 그리로 나가려고 하다가 얼어붙고 말았다.
동굴 안쪽 깊숙한 곳에서 방울 소리가 울렸기 때문이다. 딸랑딸랑, 들릴락 말락 했지만 분명히 방울 소리였다.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발길을 돌렸다. 덜컥 겁이 났지만 그게 뭔지 꼭 알아보고 싶었다. 어쩌면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히미코는 칠흑 같은 어둠을 더듬어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어둠이 눈에 익을 때쯤 돌을 쌓아 만든 제단이 나타났다.
제단 위에는 흙으로 구운 자그마한 토우(土偶)가 서있었다. 둥글넓적한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인형이 히미코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겉옷에는 비바람과 파도 무늬가 새겨져 있고 머리에 쓴 관은 치솟는 불기둥 모양이었다.
토우 앞에는 청동방울과 청동거울이 놓여 있었다. 청동방울은 여덟 개의 구슬방울이 방사형으로 둥그렇게 달렸고, 청동거울 둘레에는 알 수 없는 글자가 빽빽이 새겨졌다.
히미코는 제단 앞에 서서 그것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해녀였지만 딱 봐도 신령한 물건들이 틀림없었다.
소녀는 기도를 드리기로 했다. 토우는 아마도 신의 형상일 것이다. 이름 모를 신에게 아버지의 회복을 빌어보리라, 마음먹었다.
히미코의 기도는 티 없이 순수하고 지극히 공손했다. 참마음에서 우러나온 정성이 제단을 가득 채우고 신을 토우에서 불러냈다.
제단 앞에서 기도를 올린 소녀는 한밤중에 바다 동굴을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히미코는 꿈속에서 그 신을 만났다.
신은 토우의 형상으로 홀연히 나타났다. 소녀는 두려웠지만 용기를 내서 물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전지전능한 암흑의 신 아라하바키다. 네가 천년의 잠에서 나를 깨웠구나.”
히미코는 자신에게 신이 내렸음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전지전능한 아라하바키여, 제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히미코여, 세상에 아라하바키의 뜻을 전하고 암흑의 진정한 힘을 발동하라.”
“하지만 저는 아무 힘도 없는 해녀일 뿐입니다.”
“너는 이제 나의 신녀다. 네가 어떤 힘을 갖게 되었는지 곧 알게 될 것이다.”
이윽고 영롱한 자색 안개가 감싸더니 소녀는 청동방울을 든 무녀로 탈바꿈했다. 암흑의 신은 히미코를 아래위로 쓱 훑어보고 엄숙하게 말했다.
“태초에 어둠이 있었으니, 하늘은 어둠을 얻어서 높아지고, 땅은 어둠을 얻어서 안정되고, 만물은 어둠을 얻어서 생성되고, 신은 어둠을 얻어서 영험해지고, 임금은 어둠을 얻어서 권위가 선다. 신녀 히미코여, 전지전능한 아라하바키의 힘으로 세상을 일깨워라!”
쩌렁쩌렁한 울림과 함께 암흑신은 사라지고 소녀는 황홀한 꿈에서 깨어났다.
아직 해가 뜨지는 않았지만 동천이 훤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히미코는 습관적으로 병든 아비의 이부자리를 살폈다. 그런데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화들짝 놀란 딸은 방문을 열고 맨발로 뛰쳐나갔다. 누군가 마당 한 구석에 앉아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봐온 친숙한 등짝이었다.
“아버지!”
히미코는 달려가서 아버지의 등을 와락 끌어안았다. 다 죽어가던 아비가 씻은 듯이 나은 것이다. 건장한 뱃사람으로 멀쩡하게 돌아온 것이다.
이 소식은 금세 온 마을에 퍼졌다. 촌민들이 몰려와 떠들썩하게 축하해 줬다. 하룻밤 사이에 죽을병을 털고 일어났다며 모두 신기해했다.
촌장은 히미코를 붙잡고 이게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다. 어린 해녀는 전날 바다 동굴에서 있었던 일과 간밤에 꾼 영험한 꿈을 털어놓았다.
마을 사람들은 동굴에 가서 토우를 히미코의 집으로 모셔 왔다. 청동방울과 청동거울도 소녀의 손에 쥐여줬다. 그날부로 히미코는 마을의 무녀가 되었다.
새로운 무녀가 보여준 치유 능력은 놀라웠다. 방울을 흔들면 무슨 병이든 고쳤을 뿐 아니라 장님은 눈을 번쩍 떴고, 앉은뱅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병자와 그 가족들이 사방에서 찾아왔다.
인간은 누구나 질병과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 공포를 물리치는 히미코를 사람들은 여신으로 추앙하기 시작했다. 추종자들이 모여들었다. 야마타이는 물론 남해도 전역에서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야마타이의 군장도 그녀를 찾아와 무릎을 꿇었다. 군장 자리를 넘기고 주군으로 섬기겠다고 맹세한 것이다. 그리하여 야마타이에 무녀 군장이 탄생했다. 히미코의 명성은 남해도를 뒤흔들었다.
남해도 여러 나라의 군장들은 위협을 느꼈다. 야마타이를 제외한 여덟 개 부족의 우두머리들이 한 자리에 모여 대책을 의논했다.
“귀신에 씐 무녀에게 더 이상 현혹돼서는 안 됩니다. 큰 재앙이 닥치기 전에 전사들을 보내 저 요망한 것을 없애버려야 합니다.”
이토국의 군장 호노미가 히미코 토벌을 주장하고 나섰다. 진즉 대왕을 자처하며 남해도 통합의 야망을 불태우던 자다. 츠쿠시의 신관 이소카리는 생각이 달랐다.
“야마타이의 무녀는 남해도의 민심을 얻고 있소. 섣불리 힘자랑을 하다가는 역풍을 맞게 될 거요.”
호노미는 이소카리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토국의 야심가는 의논도 하기 전에 히미코를 치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이토국은 불을 숭배하는 부족이었다. 호노미는 하던 대로 화공(火攻)을 단단히 준비했다.
그러나 히미코는 호노미가 도발할 거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암흑의 신 아라하바키가 치유에 이어 예지의 능력을 준 것이다.
팔주령(八珠鈴)을 흔들며 천안통(天眼通) 주문을 외우면 청동거울에 앞으로 일어날 일들의 상이 맺혔다. 길흉화복이 눈앞에 나타났다.
야마타이의 무녀는 암흑신의 도움을 받아 이토국 전사들의 야습을 분쇄했다. 폭풍우를 일으켜 화차와 불화살을 무력하게 만든 다음 골짜기에 둔 적의 본진을 큰물로 쓸어버렸다.
아라하바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토국 읍성에 무서운 역병을 일으켰다. 가족들까지 픽픽 쓰러지자 호노미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히미코에게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한 것이다.
무녀 군장의 권능은 나날이 커져갔다. 남해도의 여러 나라들은 결국 히미코를 부족연맹의 임금으로 받들기로 했다. 전무후무한 무녀왕의 탄생이었다.
10년 전 츠쿠시의 신관 이소카리가 주관한 대제전에서 히미코는 여왕의 자리에 오르며 새로운 시대를 선포했다.
“태초에 어둠이 있었으니, 하늘은 어둠을 얻어서 높아지고, 땅은 어둠을 얻어서 안정되고, 만물은 어둠을 얻어서 생성되고, 신은 어둠을 얻어서 영험해진다. 전지전능한 아라하바키의 힘으로 천하를 구하리라!”
그것은 세계를 어둠과 공포로 뒤덮으려는 파천대계(破天大計)의 첫걸음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암흑신 아라하바키의 진정한 힘이 봉인돼 있다는 것이었다. 암흑신의 봉인을 푸는 방법은 단 하나다. 해와 달의 정령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
삼족오의 화신 연오가 천반선을 타고 왜로 건너가게 된 것은 무녀왕 히미코의 안배였다. 아라하바키의 현세 강림을 위한 큰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