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기야에서 출항한 천반선은 순조로운 항해 끝에 이즈모에 무사히 도착했다.
포구에는 고기잡이배들이 늘어서 있고 그물과 어구를 둘러멘 사내들이 분주히 오갔다. 천반선이 천천히 들어오자 꼬맹이들이 몰려나와 개구리 떼처럼 폴짝거리고 와글댔다.
연오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크게 심호흡을 하여 마음을 가다듬었다. 왜의 공기는 삼한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서풍이 나긋하게 불어와 뺨을 간지럽히고 지나갔다.
이어서 무쇠 할배와 쇠불아비들이 내리자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와락 달라붙었다. 이색적인 옷차림에 망치, 철퇴, 쇠몽둥이를 든 모습이 녀석들에겐 마냥 신기했다.
천반선 주인 진쾌가 연오에게 다가와 읍성까지 안내하겠다고 했다. 일행은 널찍한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소나무 숲으로 난 길을 걸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오후의 햇살이 일렁이며 그들의 뒤를 밟았다.
이즈모 읍성은 포구에서 10리쯤 떨어져 있었다. 성문 안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건장한 청년들이 우르르 몰려와 연오 일행을 가로막았다.
“너희들은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우두머리인 듯한 자가 벼락 같이 고함을 쳤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수염이 덥수룩한 젊은 사내가 날이 긴 창을 들고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덩치가 큰 태산이 연오의 앞을 막아서며 사내를 제지했다. 쇠불아비들도 꿀리면 안 된다고 여겼는지 눈알을 부라리고 맞섰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진쾌가 서글서글한 웃음을 앞세워 달랬다.
“어허, 무섭게 왜들 이러시오. 이 분들은 호공의 뜻으로 바다 건너에서 모시고 온 손님들이오.”
호공의 뜻이라는 말에 상대는 예기를 누그러뜨렸다. 산발 사내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연오 일행을 쳐다보더니 길을 터주었다.
진쾌는 저자를 지나 궁으로 향하며 이즈모에 대해 몇 가지 사항을 알려줬다.
“아까 그 사내의 이름은 이자기라고 합니다. 그이의 누이가 이자미인데, 이즈모를 다스리는 국주(國主)입니다. 그들 남매의 조상은 오래 전에 바다를 건너왔습니다.”
그는 이즈모가 도래인(渡來人), 곧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이 일군 땅이라고 했다. 도래의 행렬은 수백 년 전부터 요 근래까지 이어져 왔다. 주민들을 현지인과 이주민으로 나누기도 하지만 결국 언제 건너왔느냐의 차이일 뿐 뿌리는 대부분 삼한에 두고 있다.
현재 통치자는 국주 이자미이다. 그런데 정신적 지주는 따로 있다. 그가 바로 호공이다.
호공은 놀랍게도 사로국 혁거세거서간의 둘째 아들이자 남해차차웅의 이복동생이었다. 나이가 이백 살이 넘어 이즈모 사람들은 신선이라고 부른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해 혁거세거서간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나라의 중책도 맡았다. 마한에 사신으로 갔을 때는 왕에게 공물을 바치지 않는다는 질책을 당했는데 목숨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대등하게 교류하겠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호공의 강단이 알려지면서 세간의 평판이 치솟고 따르는 자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호평과 세력은 화를 불렀다. 이복형 남해차차웅이 보위에 오르자 그를 헐뜯는 무리가 나타났다. 그들은 호공이 장차 임금 자리를 넘볼 것이라고 모함했다.
참소가 계속되자 남해차차웅은 동생을 의심하고 견제하기 시작했다. 당시 서라벌에서는 호공의 입김이 구석구석 미치고 있었다. 하늘의 해가 둘일 수는 없다. 차차웅도 내심 호공을 부담스럽게 여기고 자신을 받들 새 인물을 물색했다.
그때 마침 용성국 왕자 석탈해가 서라벌에 나타난 것이다. 남해차차웅은 탈해에게 철기 제작을 맡기는 한편 충성의 대가로 온갖 혜택을 베풀었다. 심지어 반월(半月)의 길지에 자리한 호공의 저택까지 나라에서 거둬 그에게 넘겨줬다.
호공은 형의 처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남해차차웅이 석탈해를 사위로 들인 해에 그는 바다를 건너 이즈모로 망명했다.
이즈모 사람들은 그를 현자로 추앙했다. 지난 150년 간 호공은 주민들의 생업을 돕고 신천지를 개척하는 일에 지혜를 아낌없이 나눠줬다.
통치자들도 호공을 극진히 예우하여 궁에 거처를 지어주고 수시로 가르침을 받았다. 지금의 국주 이자미와 동생 이자기도 스승으로 모시며 친할아버지처럼 따른다.
연오는 호공을 만난다는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좀 있으면 전설적인 존재를 마주하는 것이다. 근오지의 후계자는 설렘 반 두려움 반의 심정으로 이즈모 궁에 들어섰다.
호공의 거처는 궁전 후원에 있는 허름한 세 칸 초옥이었다. 연오 일행이 초옥 앞에 멈춰서자 잠시 후 노인이 방에서 나와 마루에 앉았다.
호공은 이백 살이 넘었는데도 얼굴이 잘 익은 대추처럼 붉고 살결도 옥처럼 깨끗했다. 새하얀 백발은 머리 위로 동그랗게 묶어 올리고 하얀 수염은 풍성하게 가슴을 덮었다. 무엇보다 눈동자가 특이했다. 푸르른 벽안(碧眼)이었다.
연오는 넋을 놓고 이즈모의 신선을 바라보았다. 그는 정말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했다.
“호오, 자네는 해의 기운을 지녔군 그래.”
허를 찌르는 호공의 통찰에 연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 선조들은 대대로 근오지의 마루치였습니다. 마루치 씨족은 삼족오의 신령한 힘으로 철을 만들어왔습니다.”
“알지. 자네 선조들은 위대한 대장장이였어. 나는 그들을 좋아했다네.”
현자의 말에 연오는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다. 치밀어오르는 울음을 간신히 목구멍에서 틀어막고 고개를 돌려 먼 산을 바라봤다.
그 틈에 천반선의 주인 진쾌가 근오지에서 일어난 변고와 연오 일행을 데려온 경위를 낱낱이 털어놓았다.
호공은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나서 호리병을 가져와 잔에 술을 따랐다. 그러고는 연오에게 손짓해 술잔을 건넸다.
“한 잔 쭉 들이키게.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걸세.”
선계의 은은한 향기가 코를 간지럽히는 약주였다. 연오가 술잔을 기울이자 호공은 파초선을 꺼내 천천히 부치며 근오지의 후계자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과거와 미래의 시간이 현재로 흘러들어와 현자의 천안통(天眼通)을 열었다.
“자네 이곳에서 선조들의 유업을 계승해 볼 텐가? 아버지가 못다 이룬 삼족오의 철기를 펼치는 걸세.”
연오는 무쇠 할배와 태산을 돌아봤다. 두 사람이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연오는 섬돌 아래로 다가가 호공에게 큰절을 하고 예를 갖췄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반드시 그리 하겠습니다.”
호공은 만족스러운 듯 술잔에 약주를 따라 연오에게 다시 건넸다. 이즈모의 현자는 이 젊은이의 뒤에 어른거리는 정령을 찬찬히 들여다보고는 말했다.
“히노미사키로 가게. 삼족오의 새로운 불꽃이 그곳에서 타오를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