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미시의 습격

by 권경률

차분한 이마, 긴 속눈썹, 오뚝한 코, 도톰한 입술…. 이자미 국주는 샛별처럼 반짝거리는 눈으로 지도를 들여다보며 광석이 있을 만한 곳을 짚어 나갔다.


태산은 넋을 놓고 이자미를 바라봤다. 나이가 열 살이나 많고 홀로 된 과부지만 그가 보기에는 눈부시게 아름답다. 국주에게 도움 받는 시간이 황홀하다.


—쾅! 쾅! 콰쾅!


갑작스러운 굉음에 놀라 태산은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자미도 시녀들과 함께 조심스레 그의 뒤를 따랐다.


거인이었다. 집채만 한 거인이 궁문을 부수고 들어와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쇠방망이를 붕붕 휘두를 때마다 방패를 들고 막으려던 시위들이 나가떨어졌다.


국주의 동생 이자기가 보초 망루에 올라가 활을 연달아 쏘았다. 그러나 거인은 단단한 몸으로 화살을 튕겨내고는 망루를 붙잡고 앞뒤로 흔들었다.


보다 못한 태산이 나섰다. 마당의 박달나무를 껴안더니 쑥 뽑아 들고 거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힘으로는 누구한테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거인도 눈알을 부라리고 가슴을 두드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무시무시한 괴성이 터져 나왔다. 괴력 대 괴력이 맞붙는 순간,


“잠깐! 그만하세요.”


이자미가 의미 없는 싸움을 말리고 궁문 밖을 향해 말했다.


“거기 누구십니까? 이제 모습을 보여주시죠.”


잠시 정적이 흐르고 나서 한 소녀가 궁 안으로 들어섰다. 녹황색 담비 갖옷을 걸치고 머리는 질끈 동여매서 등 뒤로 땋아 내렸다. 솜털이 보송한 앳된 얼굴에 눈이 땡글하고 턱이 날렵하다.


“우리 애가 인사를 너무 거칠게 했군요. 나는 에미시 족장의 딸 하루카입니다.”


소녀가 말을 마치자 담장을 훌쩍 뛰어넘어 에미시 전사들이 나타났다. 짐승처럼 코를 벌름거리며 으르렁대는 모습에 국주의 시녀들이 겁에 질려 오들오들 떨었다.


“산에서 내려오신 손님들이군요. 기별도 없이 이즈모엔 어쩐 일입니까?”


이자미는 흥미롭다는 듯이 소녀에게 물었다. 하루카는 빵긋 보조개를 지으며 말을 골랐다. 차분하게 대하는 국주에게 족장의 딸은 용건을 꺼냈다.


“아버지가 전하라는 걸 말씀드릴게요. 아버지는 에미시와 이즈모가 좋은 관계를 맺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당신을 부인으로 삼겠다고 하셨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늙은이가 죽으려고 환장을 해구나.”


어느새 망루에서 내려온 이자기가 소녀를 노려보고 매섭게 말했다. 시위들이 무기고에서 꺼낸 창칼을 들고 그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궁 마당에 싸늘한 적의가 번뜩였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이자미가 손을 들어 동생을 만류했다.


“어머, 그럼 따님이 족장님을 대신해 청혼하러 왔군요.”


그녀는 볼에 고운 미소를 머금고 상냥하게 말했다. 그 자상한 모습을 보고 태산은 속으로 감탄했다. 긴장된 상황임에도 고귀한 기품을 잃지 않는다. 대단한 사람이다.


하루카는 살짝 약이 오른 듯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네, 그래요. 다음 달 보름에 혼례를 치르겠다고 하십니다. 아버지가 여기 궁으로 오실 테니 모든 준비를 해두세요.”


“만약 제가 응하지 않으면 어떡하실 건가요?”


이자미 국주는 흐트러짐 없이 하루카에게 질문을 던졌다. 눈은 평온하고 시선은 부드러웠다. 예상과 다른 반응에 족장의 딸은 생각이 많아졌다.


아버지는 도발적으로 용건을 꺼내되 적대적으로 나오면 국주를 제압하여 궁을 장악하라고 했다. 전사는 정예로만 서른 명을 추렸다. 거인 노카이는 족장의 호위를 맡은 비밀병기였다. 또 읍성 밖 숲에는 기마병 이백 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국주가 적대적이기는커녕 너무나 친절하다. 깽판을 치고 억지를 부리는데도 소름 끼치게 침착하다. 거기다 아름드리나무를 맨손으로 뽑아내는 장사가 떡 버티고 있다. 못 보던 자인데 누굴까? 이쯤에서 쳐야 하는데 왠지 찜찜하다.


하루카가 잠깐 망설이는 사이에 날카롭게 벼려진 예기가 무뎌졌다. 이때 숨 막히는 정적을 헤치고 궁전 안쪽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웬일로 시끄러운가 했더니 손님들이 왔구나.”


새하얀 수염이 가슴을 덮고 백발은 머리 위로 틀어 올린 벽안의 노인이었다. 하루카는 신기한 듯 쳐다봤다. 호공이라고 했던가. 나이가 이백 살도 넘었다는 그 늙은이다.


호공의 뒤에서 한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야철장 세우는 일을 의논하기 위해 태산과 함께 궁에 와있었던 연오다.


족장의 딸은 숨을 삼켰다. 짙은 눈썹과 조각 같은 콧날, 떡 벌어진 어깨와 늠름한 가슴. 소녀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장부다.


문득 청년과 눈길이 마주쳤다. 그의 까만 눈동자 속에 불꽃이 춤추고 있다. 소녀는 어쩐지 부끄러워 시선을 딴 곳으로 돌렸다.


이자미가 호공의 귀에 대고 속닥속닥 얘기하고 있었다. 호공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호오, 청혼을 하러 왔다고? 그런데 혼례는 서로 패가 맞아야 하는 법. 에미시는 이즈모에 무엇을 줄 수 있는가?”


하루카는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저 미장부 때문에 할 일을 까먹고 있었다.


“에미시가 줄 수 있는 게 있지요. 여러분을 살려드릴 수 있습니다.”


“허허, 그건 좋은 패가 아니로군. 패가 안 맞으니 이만 돌아가게.”


호공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가로젓자 족장의 딸은 분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품에서 호각을 꺼내 길게 불었다.


두두두두, 잠시 후 말발굽 소리와 함께 땅이 울렸다. 숲에서 대기 중이던 에미시 기마병들이 득달같이 읍성으로 진입한 것이다. 부서진 궁문 밖으로 먼지가 자욱이 일었다. 사람들의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궁 안의 에미시 전사들은 별안간 칼날을 혀로 핥았다. 살육의 희열을 예감하고 피의 향연을 준비하는 것이다. 거인 노카이도 쇠방망이를 고쳐잡으며 눈을 희번덕거렸다. 잔혹한 광기가 깨어나고 있다.


바로 그때 연오가 불꽃망치를 들고 앞에 나섰다. 망치로 땅을 치고 빙글빙글 돌리자 자색 안개가 피어올랐다. 다시 하늘을 향해 망치를 치켜들자 눈부신 광휘가 뿜어져 나왔다.


빛의 덩어리들이 꼬리를 그리며 하늘 높이 솟구쳤다. 그것은 곧 삼족오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연오가 망치를 앞으로 휘젓자 삼족오들이 궁문 밖으로 날아갔다.


—펑! 펑! 펑!


잠시 후 바깥에서 폭발음이 연달아 나더니 겁에 질린 울부짖음이 대기에 절박하게 울려 퍼졌다.


연오는 계속해서 망치를 옆으로 휘저었다. 이번에는 삼족오의 광휘가 고리 모양으로 바뀌어 궁 안의 에미시 전사들과 거인을 직격하고 소용돌이치는 불길 속에 가둬버렸다.


연오가 마루치의 비급을 보고 히노미사키에서 연마한 불꽃 소환술이었다. 하루카는 미장부의 경이로운 능력에 전율하며 얼어붙어 버리고 말았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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