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노미사키는 이즈모반도 서쪽 끝에 있는 작은 어촌 마을이었다.
해안을 굽이굽이 돌아 외딴 만에 이르면 깎아지른 절벽이 나타나고 그 아래 민가 몇 호가 드문드문 자리하고 있다.
마을에 당도한 쇠불아비들은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았다. 험한 지형과 외진 환경에 혀를 내두르는 기색이다.
무쇠 할배는 벼랑과 벼랑 사이에 들어앉은 깊은 골짜기를 눈여겨 보았다. 할배의 머릿속에는 새로운 철막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태산은 두리번거리며 연오를 찾았다. 마을에 들어온 뒤로 통 보이지 않았다.
연오는 해안 절벽을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그 깎아지른 아찔함이 어쩐지 자신의 처지 같다고 느꼈다. 벼랑 끝에 서보고 싶다는 간절하고 도전적인 열망에 사로잡혔다.
넘어갈 듯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안간힘을 다해 뻗은 손으로 정상을 짚는 순간, 북받치는 희열과 함께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벼랑 끝에서 바라본 바다는 망망하다. 한낮의 햇살이 물결 위에서 은빛으로 춤추고, 수평선 위로 흘러가는 구름은 태평하기만 하다.
지난 보름간 벌어진 일이 믿기지 않는다. 혼례일에 습격을 당했고,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했으며, 구사일생으로 바다를 건넜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기도 힘들 정도다.
벼랑 끝에 서보니 비로소 실감이 난다.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딘지 깨닫는다.
하지만 연오는 혼자가 아니라고 느꼈다. 아버지와 세오가 곁에서 지켜보고 있다. 보이지는 않지만 알 수 있다. 그리고 내 사람들이 곁을 지키고 있다.
그래, 용기를 내자. 해모수의 신물을 찾아내고 불꽃의 연금술을 완성하는 거야. 마루치의 유업을 완수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거야.
연오는 주먹을 불끈 쥐고 다시 바다로 눈길을 돌렸다. 절벽 바로 아래에 커다란 암초가 있었다. 저 바위섬에 밧줄을 메고 바다 건너 근오지를 묶어 이곳으로 끌어당기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세오를 품에 안을 수 있을 텐데.
“하이고, 여기 있었네.”
태산이 벼랑 끝에 선 연오를 발견하고 다가와 어깨를 툭 쳤다. 곧이어 무쇠 할배도 모습을 드러냈다.
“골짜기를 살펴보다가 절벽으로 올라오는 산길을 찾았네.”
쇠불아비들도 뒤따라와 절벽 위에 도열했다. 연오는 한 사람 한 사람 눈을 맞추고 나서 무쇠 할배에게 말했다.
“히노미사키에 용광로를 만들어 주시겠습니까? 여기 토질을 보니 점성이 좋더군요. 점토에 짚이나 갈대를 잘 섞으면 노벽(爐壁)이 제법 튼튼할 것 같습니다.”
무쇠 할배는 말없이 미소로 화답했다. 이번에는 태산에게 과제를 내줬다.
“이즈모와 주변 지역에서 광석을 찾아줘. 철의 함량이 8할 이상은 돼야 해. 철과 맥석이 잘 분리되는지도 살피고. 이자미 국주가 도와주기로 했으니 먼저 만나 봐.”
연오는 호공의 당부를 떠올렸다.
이즈모에서 뛰어난 대장장이들을 찾았던 데는 시급한 이유도 있었다. 근처 산악지대에 사는 에미시족이 해안에 정착한 이즈모 주민들을 자주 약탈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미시족은 왜의 토착 원주민들로 호전적인 전투종족이다. 최근 들어 이즈모에 도래인들이 많이 모여들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자 부쩍 침입이 늘고 횡포가 심해졌다.
노략질을 막고 에미시들을 물리치려면 우수한 철제 무기로 단단히 무장하는 수밖에 없다. 호공은 연오에게 이른 시일 내에 강력한 무기를 생산해 달라고 당부한 것이다.
연오도 얼른 일에 몰두하고 싶었다. 상실감을 달래는 데는 일이 최고니까.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삼족오철정으로 만들어낼 신무기들이 형태와 성능을 갖추기 시작했다.
근오지 천군 준오는 오랜만에 사로국 신궁에 들어갔다. 대신관 석벌휴의 호출을 받은 것이다. 며느리가 될 아이도 데려오라고 했다. 세오는 담담히 아버지를 뒤따랐다.
하지만 준오는 잠시 후 대신관에게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고 말았다.
“이 아이는 내 며느리가 될 수 없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거사를 걸고 서로 약조한 일이지 않습니까?”
준오의 반발에 석벌휴는 싸늘한 미소를 짓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 아이는 홀몸이 아니오. 태중에 사내의 씨앗을 품었소.”
천군은 벙쪄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딸을 바라보았다. 대신관 석벌휴는 신력으로 임신 사실을 알아냈을 것이다. 그렇다면 틀림없다. 세오가 연오의 아기를 가진 것이다.
—철썩!
준오가 분을 참지 못하고 딸의 따귀를 갈겼다. 세오는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변명이라도 해보거라.”
그러나 세오는 입을 꾹 닫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으로 저항한 것이다.
준오는 눈앞이 캄캄했다. 딸 때문에 거사가 꼬여 연오를 죽이지도 못하고, 공을 세우지도 못했다. 그가 두두리의 습격에 관여한 것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생겨나고 있다. 군장의 자리에 오른다고 해도 입지가 불안해졌다.
이 때문에 딸을 반드시 석벌휴의 며느리로 만들려고 한 것이다. 사로국 대신관을 확실한 뒷배로 삼아야 했다. 그런데 이마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공든 탑이 다 무너지게 생긴 것이다.
준오의 표정을 살피던 석벌휴는 짐짓 위로하는 척하며 다른 방법을 제안했다.
“며느리로 들이는 것만 능사는 아닙니다. 아들의 첩으로 삼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지밀에게 부인이 없으니 사실상 안주인 자리에 앉는 셈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여식을 아들의 첩으로 삼겠다니, 자존심이 강한 준오로서는 모욕적인 제안이었다. 하지만 근오지의 권좌에 오르려면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천군 준오는 마지못해 수락하고 한 가지 조건을 붙였다.
“지금부터 제 딸은 죽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혼례가 깨지고 상심하여 앓다가 죽은 것입니다. 딸아이를 데려가되 이 점을 유의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 아이가 살아있는 게 알려져서는 안 됩니다.”
준오는 세오를 묻어버릴 작정이었다. 임신했다는 것도, 첩이 된다는 것도 큰까막골 사람들이 알아서는 안 된다. 자기 체면이 구겨질까 봐 살아있는 자식을 무덤에 집어넣으려고 하는 것이다. 세오를 대신관의 집에 짐승처럼 묶어 놓으려는 것이다.
석벌휴는 기뻐하며 준오의 결단을 반겼다.
“감사하오. 내가 이 아이를 며느리처럼 잘 보살필 것이오. 이제 우리가 사돈이 된 것이나 진배없으니 축하연을 갖는 게 어떻겠소?”
대신관 석벌휴는 연회장으로 이동하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숙원사업으로 종합적인 철기 생산 체계를 구축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근오지 까마귀철막에 이어 울뫼 달천광산을 손에 넣고 서라벌 황성대장간을 정비하는 게 골자다.
이로써 채굴, 야철, 단야, 성형, 용해주조 등 철기 생산의 모든 공정을 장악할 수 있다. 삼한에서 누구도 이룩하지 못한 대업을 성취하는 것이다.
박씨에게 빼앗긴 임금 자리를 되찾을 명분으로 이보다 더 빛나는 게 있을까.
그러려면 현재 까마귀철막을 수습하고 있는 준오를 부려 먹어야 한다. 천군의 딸을 아들의 첩으로 들이려는 건 그래서다. 실상은 첩이 아니라 인질이다.
게다가 신력으로 들여다본 세오의 씨는 범상치가 않았다. 삼족오의 정령이 어른거리는 것을 보았다. 자신의 곁에 묶어두면 언젠가 쓰임이 있을 터였다.
그날 밤 사로국 신궁에서는 성대한 잔치가 끝없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