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입니다. 계속하면 무서운 화를 당할 겁니다.”
연오는 서릿발처럼 싸늘한 음성으로 하루카에게 말했다.
족장의 딸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인 노카이는 불에 그을려 머리카락이 타버렸다. 다른 전사들도 불꽃 고리에 맞아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낭패다.
“좋아요. 오늘은 이만 물러갈게요. 당신은 누구죠?”
“나는 대장장이 연오입니다. 삼한에서 바다를 건너 왔지요.”
말씨는 부드럽지만 전신에 위엄이 흐른다. 신령한 능력으로 보아 범상치 않은 내력을 지닌 게 틀림없다. 하루카는 연오에게 깊은 관심을 품고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거리에는 에미시 기마병들이 낙마하여 신음하고 있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시뻘건 불덩어리가 날아와 폭발했다는 것이다. 말들은 미쳐 날뛰더니 산으로 달아나 버렸다.
족장의 딸은 후일을 기약했다. 아버지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틀림없이 다음 달 보름에 산에서 내려와 이즈모 국주와 혼례를 치르려고 할 것이다.
에미시 주술사의 흑마술도 펼쳐질 것이다. 하루카는 사람을 쥐어짜서 짜부라뜨리는 잔혹한 주술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돌아가는 발길이 무겁다.
이즈모 궁에서는 환성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이 연오를 에워싸고 놓아주질 않는다. 불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청년에게 모두 경탄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단한 신력이군요.”
이자미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고마움을 표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에미시족의 위협으로 인해 걱정이 컸었는데 다소나마 근심을 덜게 되었다.
“아닙니다. 도와주신 덕분에 히노미사키에 자리를 잡아가는 걸요.”
연오가 손사래를 치고 겸손해하자 태산이 슬쩍 끼어들었다.
“힘쓸 일이 있으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한달음에 달려올 테니….”
태산의 은근한 힘자랑에 마당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오늘은 힘을 썼으니 돌아가 쉬시게. 여기도 정리를 좀 해야겠네.”
호공의 권유에 연오와 태산은 정중히 예를 표하고 궁에서 나왔다.
히노미사키로 돌아가는 해안 길은 뱀처럼 구불구불하다.
작은 만과 만이 연속되고, 바다는 깊숙이 육지로 들어와 마을 바로 앞에서 숨을 고른다. 그 끄트머리에 작은 포구와 집들이 매달려 있다. 배들은 그 굴곡 안에서 안전하게 묶여 있는 모습이다.
조금 전까지 보이던 바다가 다음 굽이를 돌면 사라지고 또 다른 바다가 나타난다. 길은 어느새 굽이치는 시간 속으로 접어든다.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쓸려가는 삼한의 시간이 그리움에 사무친다.
이윽고 히노미사키에 이르렀을 때 바다를 건너온 비보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연오야… 태산아….”
고향 소식을 갖고 온 사람은 두들아비 추수지였다. 두두리가 습격했을 때 사로국에 잡혀갔다가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바다로 도망쳤다는 것이다.
그는 원래 음즙벌국의 고아였는데 떠돌아 다니는 걸 몽돌 아재가 거둬 철막에 들였다. 연오보다 두 살 많지만 어려서부터 태산과 함께 친구처럼 지냈다.
추수지가 몽돌의 장렬한 최후를 전하자 태산은 입을 굳게 다물고 깊은 침묵에 빠졌다. 본래 바위 같은 사람이 더욱 무거운 바위가 된 것 같았다.
존경스러운 죽음이라서 마음껏 슬퍼할 수도 없었다. 아들은 이제 아버지의 연장선에 섰다. 유업을 계승하여 자기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
달래 부인과 두들아비들은 서라벌로 끌려갔다고 한다. 태산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어머니와 동료들을 구해내리라.
연오는 충격을 받았다. 몽돌 아재가 죽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달래 유모가 끌려갔다고 하니 가슴이 찢어졌다. 그리고,
“세오는 혼례가 깨지고 나서 상심하여 앓다가 그만….”
추수지가 머뭇거리며 전한 소식에 연오는 무너지고 말았다.
세오가 죽었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그는 벼랑 끝으로 달려가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았다. 저 바다 건너에, 저 하늘 아래에 그녀가 없다고 한다. 그 향기로운 숨결이 바람에 흩어졌다고 한다.
연오는 머리를 감싸쥐며 털썩 주저앉았다. 끝없는 자책이 이어졌다. 그때 구름산 아래에 세오를 두고 오지 말 걸. 가녀린 몸으로 추격을 막게 두지 말 걸.
희뿌연 상실의 슬픔이 안개처럼 수평선 위로 피어올랐다. 그는 목구멍까지 치민 울음을 참고 옛 동요를 나지막이 읊조렸다. 세오에게 불러줬던 그 노래다.
“하늘과 바다가 껴안는 곳에서 / 해와 달이 만나 새날을 여니 /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사로국 신궁에 내동댕이쳐진 세오는 문득 연오가 들려줬던 노래를 떠올렸다. 낮고 굵은 목소리에 미세한 떨림이 깃든 그의 음성이 달빛 아래서 되살아났다.
그것은 하늘과 바다가 껴안는 수평선의 노래였다. 해와 달이 만나는 천변(天變)의 노래였다. 세오는 노래에 담긴 예언대로 연오와 재회할 것을 의심치 않았다.
신궁에서 그녀의 처지는 비참했다. 대신관 부인 벽화는 세오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남편이 아들의 첩으로 들였지만 여종처럼 부리고 모질게 구박했다.
세오는 이른 아침부터 깊은 밤까지 쉴 새 없이 일했다. 물 긷기, 빨래, 설거지 등 온갖 잡일을 도맡았다. 고단한 생활로 손발이 까지고 입술이 부르텄다.
벽화 부인은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세오에게 벌을 줬다. 빨래한 옷이 상했다고 매질을 했고, 음식의 간이 안 맞는다고 밥상을 엎었다.
사실 벽화는 전부터 세오를 별렀다. 길쌈대회에서 자기 딸 옥진을 제치고 우승했기 때문이다. 앙심을 품은 부인은 세오가 수중에 들어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괴롭히고 고통을 가했다. 총명하고 아름다운 세오를 짓밟으면서 쾌감을 느꼈다.
벽화 부인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아들 지밀의 엽기적인 행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