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하바키를 섬기는 떠돌이 주술사

by 권경률

에미시 족장 우타리는 하루카가 산채로 돌아왔다는 보고를 받았다. 부리부리한 눈에 수염이 덥수룩한 족장은 애지중지하는 딸을 보기 위해 마장(馬場)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사와 기마병들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타다 만 장작처럼 불에 그을려 나자빠졌다. 무섭게 타오르는 불꽃이 대기를 가르며 날아다니던 광경이 아직도 그들의 눈앞에 선했다.


족장이 다가오자 하루카가 오른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아버지. 대장장이 주술사에게 당했어요.”


딸이 이즈모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자 우타리는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무거운 침묵이 고이며 산채가 정적에 잠겼다.


“노카이, 당장 뱀굴에 가서 아차포를 데려오도록.”


면목 없이 서 있던 거인은 족장의 지시에 성큼 나서더니 산 위쪽으로 사라졌다.


한 시진 만에 에미시 주술사가 노카이의 어깨에 올라타고 모습을 드러냈다. 시커먼 마의를 걸치고 목에는 뱀을 칭칭 둘렀다. 얼굴은 말라붙은 흙처럼 갈라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했다.


거인의 어깨에서 내려온 주술사는 초점 없는 눈으로 하루카를 힐끗 쳐다봤다. 오싹한 기운에 족장의 딸은 몸서리치며 시선을 돌렸다.


“이즈모에 이방인 주술사가 나타났소. 아차포, 그대의 신묘한 힘이 필요하오.”


우타리 족장은 곧바로 용건을 꺼냈다. 전사들이 연오에게 어떻게 당했는지 아차포에게 알려줬다. 에미시 주술사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해모수의 후예가 신물을 찾으러 왔군요. 흐흐흐.”


아차포의 눈길이 이즈모 쪽으로 향하였다. 허공 속에서 무언가를 더듬는 듯했다.


“그자가 신력을 익히기는 했지만 아직 서투릅니다. 더 크기 전에 싹을 자르는 게 좋겠습니다.”


주술사는 족장에게 그 일을 맡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시선을 돌린 하루카에게 다가갔다. 그에게서 오래된 흙냄새가 났다.


“족장님, 이번 일을 마치면 저의 청도 좀 들어줬으면 하는데….”


애매모호하게 흘리기는 했지만 우타리는 아차포의 뜻을 알아차렸다. 자신의 딸 하루카를 신부로 삼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주술사 아차포가 에미시 산채에 온 것은 재작년이었다. 본래 에미시 주술사는 족장과 함께 대대로 세습하는 지배층이었다. 그런데 재작년 봄에 산채의 주술사가 계승자 없이 급사했고 때마침 이 자가 나타난 것이다.


아차포는 비범한 신력을 보여줬지만 정체가 불분명한 떠돌이였다. 우타리 족장은 에미시의 옛 고향 북해도에 사람을 보내 뼈대 있는 주술사를 찾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장로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족장을 견제하기 위해 아차포를 밀었다. 아차포가 에미시족의 고향 신 아라하바키를 섬긴다는 것도 좋은 명분이었다.


족장은 북해도에서 주술사를 찾는 데 실패하자 어쩔 수 없이 아차포를 받아들였다. 아라하바키의 이름으로 떠돌이 주술사를 용납한 것이다.


단, 우타리는 여전히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정체가 불분명한 자에게 딸을 허락할 수는 없었다.


“주술사의 소임을 다하는 데 다른 조건을 붙이지는 말게나. 다음 달 보름에 이즈모를 칠 테니 대장장이 주술사를 꼭 제거해야 하네. 혼사는 그다음에 의논하세.”


아차포는 불만스러웠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하루카는 곧 수중에 들어오게 돼있다. 주술사는 멀찍이 서있던 장로들과 의미심장한 눈빛을 나눴다.




이즈모 읍성은 연오가 수레에 싣고 온 무기와 농기구 덕분에 활기가 돌았다.


주민들은 쟁기, 쇠스랑, 곡괭이, 호미, 낫을 받아 들고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척 보기만 해도 야무지게 만든 철제 농기구였다. 들고 다니기만 해도 왠지 든든하고 농사가 잘될 것만 같았다.


궁전 마당에서는 군사 훈련이 한창이었다. 기존의 시위 병력에 새로 뽑은 장정들을 합쳐 삼백여 명을 모았다.


일찍이 몽돌에게 전사 수업을 받은 태산이 교관으로 나섰다. 앞에서 창칼 쓰는 법을 가르친 다음 한 사람씩 자세를 가다듬으며 어떤 무기가 잘 맞는지 살폈다.


천하장사 태산이 긴 칼을 젓가락 다루듯이 가볍게 휘두르는 걸 보고 지나가던 이자미 국주가 멈춰서서 눈웃음을 지었다. 태산은 힘이 솟는지 훈련에 열정을 불태웠다.


국주의 남동생 이자기는 연오가 갖고 온 각궁을 처음으로 써보고 혀를 내둘렀다. 물소의 뿔을 얇게 덧대니 화살이 훨씬 멀리 날아가고 과녁도 힘 있게 꿰뚫었다.


“좋은 활이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활시위를 걸면 펴지고 빼면 구부러지니 갖고 다니기에도 편하겠군요.”


이자기는 연오를 깍듯하게 대했다. 자신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그릇이 크고 인품이 너그러워 벌써부터 궁인들이 따랐다. 사람을 사로잡고 포용할 줄 아는 젊은이였다.


히노미사키 제철소에서 만들어온 철제 무기들도 놀라웠다. 삼한 제일의 제련법과 숙련된 단야를 통해 불순물을 제거하고 조직을 강화했다.


길이가 긴 칼도 잘 부러지지 않았다. 덕분에 칼자루를 두 손으로 잡는 쌍수도(雙手刀)를 실전에서 쓸 수 있게 되었다. 군사들에게 나눠주고 훈련을 해보니 칼을 내려치는 힘이 월등히 세졌다.


반달 모양의 언월도(偃月刀)는 추수지의 장인정신이 깃든 작품이다. 철정을 망치로 두드려 펴고 그것을 구부리고 접어서 다시 두드려 펴는 공정을 여러 차례 반복해 강도를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지휘관이 말 타고 달려가 언월도를 휘두르면 바위가 쩍 갈라졌다.


에미시족이 일방적으로 통보한 족장과 국주의 혼인날이 코앞으로 닥쳐왔다. 이즈모의 운명이 걸린 결전의 날이다. 비록 병력은 열세였지만 이즈모 사람들은 만반의 준비를 해나갔다. 그 중심에 바다를 건너온 삼족오의 화신 연오가 있었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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