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사는 에미시들은 곰을 신성한 존재로 여겼다.
출정 전야에 산채에서는 곰의 영혼을 신들의 나라로 돌려보내는 이요만테가 벌어졌다. 신들에게 존경과 감사를 표하고 에미시족의 결속을 다지는 의식이었다.
주술사 아차포의 개회 선포와 함께 전사들이 우리에서 두 살배기 불곰을 끌고 나와 마장 한복판에 세운 기둥에 묶었다.
이 곰은 2년 전 월동 중인 곰굴에서 데려온 새끼인데, 그동안 산채에서 모유와 좋은 음식을 먹이며 신으로 대접해 왔다.
곰의 영혼을 신들의 나라로 돌려보내려면 먼저 신성한 곰을 죽여야 한다.
에미시 족장 우타리가 활시위를 당겨 기둥에 묶인 곰에게 대나무 화살을 쏘았다. 뒤이어 장로들이 차례로 화살을 쏘았다. 불곰이 몸부림치며 고통스러워 했다.
마지막 숨통을 끊는 것은 주술사의 몫이었다. 아차포는 단검을 빼 들고 곰에게 다가가 단번에 멱을 땄다. 검붉은 피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주술사는 피를 받아 전사들에게 돌렸다. 곰의 모피를 벗기고 고기도 나눠 먹었다. 해골은 장대에 꽂고 그 위에 모피를 씌워 우상으로 삼았다.
이요만테 의식은 아차포의 외침과 함께 마침표를 찍었다.
“이제 곰은 신들의 나라로 돌아갔다!”
전사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올리며 뒤풀이 술판을 벌였다. 기장으로 빚은 술을 마시며 밤이 깊도록 노래하고 춤췄다.
술이 오르자 전사들이 눈을 희번덕거리고 괴성을 질러댔다. 에미시 주술사가 술에 양귀비 열매즙을 탔기 때문이다. 눈앞에 신들이 어른거리고 환각 속에서 적들을 무찔렀다.
힘이 불끈 솟으며 전사들은 하나가 되었다. 전사 한 명 한 명이 에미시의 일부가 되었다. 그 상태 그대로 우타리 족장은 진군령을 내렸다.
에미시 전사들은 한밤중에 곰의 우상을 앞장세우고 산채를 출발했다. 이 산 저 산에서 군사가 합류하여 산모퉁이를 돌 때마다 병력이 불어났다.
이즈모에 이르렀을 때는 희뿌연 어둠이 걷히며 먼동이 트고 있었다. 1천여 명의 에미시 군단이 읍성 앞에 집결했다.
—뿌우우
뿔피리 소리와 함께 드디어 공성전이 시작되었다.
에미시 기마병들이 말을 몰고 파죽지세로 달려 나갔다. 밤새워 행군하는 동안 술은 깼지만 광기는 그대로 살아있었다.
그러나 성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성가퀴 사이로 어른거리는 그림자들만이 비장한 수성의 의지를 다지고 있었다.
—히히힝, 철퍼덕
별안간 앞에서 달리던 말들이 고꾸라지며 바닥에 처박혔다. 이즈모에서 깔아놓은 마름쇠를 밟고 발굽이 찢겨 나간 것이다.
에미시 기마병들이 멈칫하는 순간 성곽 위에 숨어있던 이즈모 결사대가 벌떡 일어나 화살 세례를 퍼부었다.
“기마병을 쏘아라!”
국주의 동생 이자기가 표적을 가리켰다. 버들잎 모양 화살촉을 박은 유엽전이 기마병들의 목과 가슴을 관통했다. 피가 분수처럼 솟아 들판을 붉게 물들였다.
그러자 우타리 족장도 궁병을 전진 배치했다. 에미시 궁병들은 성벽 앞에 세워둔 방어용 목책을 겨냥해 불화살을 연달아 날렸다.
목책에 불길이 번지고 연기가 치솟았다. 이즈모 결사대의 시야가 가려졌다. 눈이 따가워 앞을 보기가 힘들었다.
이를 틈타 에미시 전사들이 성벽에 접근해 사다리를 걸었다. 대나무를 엮고 횡목을 박은 사다리였다. 전사들은 사다리를 밟고 개미 떼처럼 기어 올라갔다.
그러자 성곽 위에서 돌덩어리가 굴러떨어졌다. 사다리를 올라가던 전사들이 머리에 맞고 피를 철철 흘리며 성벽 아래로 거꾸러졌다.
이즈모 결사대는 제철소에서 새로 만든 꺾창을 아래쪽으로 휘저어 성벽에 달라붙은 적들을 떨어뜨리고 사다리를 넘어뜨렸다.
성벽 아래에 있던 에미시 전사가 위를 보고 활을 쏘았다. 촉이 끌처럼 생긴 관통용 화살은 가죽 갑옷을 뚫고 살과 뼈를 파고든다.
화살을 맞은 결사대원이 가슴에 박힌 화살대를 움켜쥐고 성가퀴 아래에서 숨을 딸꾹거렸다. 그 자리로 전사들이 성벽을 넘어온다.
그러나 성곽 위에는 태산이 떡 버텼다. 언월도가 햇빛을 반사하며 눈부신 칼춤을 추었고 전사들의 팔다리가 사방으로 날아갔다.
—쿵, 쿵, 쿵
성문에서 둔중한 충격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통나무 끝에 철갑을 씌운 충차가 성문을 때리고 있었다. 가죽과 나무를 덮은 지붕 아래에서 에미시 전사들이 박자를 맞췄다. 그 충격으로 성벽에서 돌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이즈모 결사대는 동아줄을 당겨 성문 위의 기름 항아리를 엎었다. 펄펄 끓는 기름이 충차 지붕 위로 쏟아졌다. 뜨거운 기름을 뒤집어쓴 전사가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성벽에서 벌어진 격렬한 공방전에 읍성 주민들은 극도의 공포심에 휩싸였다.
흙먼지와 연기가 성안으로 밀려와 거리, 도로, 민가를 뒤덮었다. 시야가 뿌옇고 앞이 안 보이니 소리도 왜곡되어 비명과 신음이 자꾸만 메아리쳐 울렸다. 성문에서 나는 충격음은 주민들의 심장을 때렸다.
해가 저물어 어둠이 성을 에워쌌지만 공방전은 좀처럼 결판이 나지 않았다. 에미시 전사들은 뒤로 물러나 대열을 정비했다. 모두 성을 공격하느라 상하고 지쳐 있었다.
이윽고 주술사 아차포가 나섰다. 아라하바키를 섬기는 자는 암흑의 힘을 부여받는다. 빛이 사라진 곳에서 무시무시한 위력을 뿜어낸다.
에미시 주술사는 곰의 해골을 머리에 쓰고 모피를 두른 차림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전사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길을 터주었다.
아차포는 대열의 선두에 선 우타리 족장을 지나 읍성을 향해 계속 걸어갔다. 성에서 백 보 거리에 이르러서야 그의 걸음이 멈춰 섰다.
들판 한복판에서 주술사는 두 팔을 치켜들고 어둠을 불러 모았다. 웅얼웅얼, 낮고 음울한 주문을 반복해서 외우며 암흑신에게 빌었다.
“아라하바키여, 어둠 속의 진정한 어둠이여, 암흑의 위대한 힘을 보여주소서.”
잠시 후 들판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어둠이 소용돌이쳤다. 대지가 울부짖으며 아래위로 흔들렸다.
주술사가 감격에 찬 표정으로 손바닥을 땅에 갖다 댔다. 회오리바람이 일더니 땅이 쩍 갈라졌다. 지진이었다.
지진은 거센 회오리바람을 몰고 성벽으로 맹렬히 달려갔다. 암흑신의 권능이었다.
—콰쾅
거대한 굉음과 함께 성벽 한쪽이 무너졌다.
자욱한 흙먼지를 뚫고 에미시 전사들이 읍성 안으로 돌진했다. 결사대는 쌍수도를 두 손으로 쥐고 비장하게 맞부딪쳤다.
혼전이었다. 누가 아군인고 누가 적군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어둠 속에 번뜩이는 살기와 창칼 부딪히는 소리와 비릿한 피 냄새가 먹먹하게 뒤엉켜 감각을 삼켜버렸다.
그들은 격렬하게 베고, 찌르고, 치고받았다. 누군가가 넘어졌고, 누군가가 밟고 지나갔다. 비명과 신음은 마지막 불빛과 함께 점점 잦아들었다.
주술사 아차포는 피가 내를 이룬 성곽을 지나 이즈모 궁으로 나아갔다. 어둠 저편에서 연오가 불꽃망치를 집어 들고 손님 맞을 채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