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밀은 대신관 석벌휴의 장남이라 어려서부터 사람들 위에 군림했다. 뱀처럼 차가운 성품은 아버지를 빼닮았다. 그런데 대신관이 그 성품을 교활하게 쓰는 반면 지밀은 잔인하게 휘두른다.
그는 사냥을 좋아했는데 짐승을 잡으면 꼭 머리를 잘라 거머쥐고 돌아왔다. 그러고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옆에 두고 술상을 받았다.
세오를 불러 짐승의 피를 얼굴에 바르기도 했다. 피범벅을 한 얼굴은 하인들에게 보여주고 웃음을 강요했다. 겁에 질려 떨면서도 억지로 웃음 짓는 모습을 보고 흡족해했다.
때로는 기녀들을 집에 데리고 와 노래와 춤을 즐겼다. 가무는 계속되어야 한다. 중간에 끊기거나 마음에 안 들면 벌주를 마시게 했다. 술잔 두 개를 기녀에게 내미는데 하나는 독이 든 술이다. 피를 토하고 쓰러지면 배꼽을 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신궁의 하인들은 중한 병이 들어도 약을 쓰지 못하게 했다.
“약은 약한 자들이나 먹는 거다.”
그러면서 자기는 향이 짙은 약초를 태우며 잠자리에 들었다.
하루는 병들어 신음하는 하인을 보다 못해 세오가 몰래 약을 지어 먹였다. 산과 들에서 나는 약초에 통달한 그녀다. 다 죽어가던 환자가 금세 병을 떨치고 일어났다.
그 일을 누군가 지밀에게 귀띔했다. 그는 당장 첩을 끌고 오게 했다.
“그대는 신궁이 약한 자들의 소굴이 되길 바라는가?”
세오는 침묵으로 응수했다. 지밀은 냉랭한 미소를 짓더니 칼을 뽑아 들었다. 그가 첩의 뒤로 돌아가 목을 치는 자세를 취하자 시중을 들던 계집종들이 경악했다.
—붕, 사각.
눈 깜짝할 사이에 칼이 사선을 그었다. 바닥에 굴러떨어진 것은 세오의 머리가 아니라 둥글게 틀어 올린 머리칼이었다.
“나는 이 술이 제일 맛있더라.”
지밀은 술잔 바닥에 머리칼 한 줌을 깔고 술을 가득 따라 마셨다.
세오는 고개를 들어 지밀을 똑바로 쳐다봤다.
이 자는 사람을 죽이지는 않으나, 사람으로 살 수 없게 만든다.
지밀도 흥미롭다는 듯이 세오의 눈을 들여다봤다.
큭큭. 이 여자는 전 부인들과 달리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구나.
그럴수록 지밀은 구미가 당겼다. 새로운 장난감이 생긴 것이다. 다만 이 장난감은 주의 사항이 붙어 있었다. 그것도 아버지가 단단히 못 박았다.
“근오지 천군의 딸은 머지않아 우리 석씨족에게 귀한 선물을 안겨줄 아이다. 그러니 각별히 유념하여 몸이 상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알겠느냐?”
대신관 석벌휴가 신신당부한 것으로 보아 이 여자에게는 뭔가 특별한 비밀이 있다. 당분간 잠자리도 삼가라고 했으니 지밀에게는 무늬만 첩인 셈이다.
아버지는 장남에게 관대한 편이다. 잘못을 저질러도 나무라는 법이 없다. 단, 자신이 유념하라는 것을 소홀히 하면 눈빛이 달라진다. 사람을 얼어붙게 만드는 눈빛이다.
대신관의 눈 밖에 났다가는 후계자 자리가 날아가는 수가 있다. 배다른 동생 지소가 곧 성년이다. 아버지 같은 사람이 장남에게 연연할 리가 없다.
지밀은 그래서 세오를 조심히 다루고 있다. 재미로 겁을 주기는 하지만 몸은 상하지 않도록 신경 쓴다. 아직 속사정은 알지 못했다. 세오가 연오의 아이를 품고 있는 줄은 몰랐다.
삼족오의 또 다른 화신이 사로국 신궁에서 꿈틀거리며 깨어나고 있었다.
한편 세오가 죽었다는 비보를 접한 연오는 상심을 달래기 위해 더욱 일에 몰두했다.
히노미사키 골짜기에 드디어 삼족오제철소가 문을 열었다.
제철소 한복판에는 연오가 설계한 원통형 용광로가 들어섰다. 높이가 일곱 자(약 2미터), 지름이 다섯 자(약 1.5미터)로 근오지의 것보다 규모가 컸다.
원통로는 바닥에 구멍을 판 다음 점토에다 볏짚과 갈대를 섞어 벽체를 올렸다. 바람을 불어넣는 풀무는 여섯 명이 밟을 수 있도록 했다. 은근하고 지속적인 송풍을 위해 송풍관은 관입구가 넓어지게 하였다.
제련용 목탄은 화력이 좋은 참나무 숯을 사용했다. 노 안의 온도가 안정적으로 올라가면 철광석을 투입했다. 철광석은 이자미 국주의 도움을 받아 마쓰에 산지에서 자철석을 구해 왔다.
철광석과 목탄의 비율은 투입이 끝나는 시점까지 일 대 일의 무게로 했다.
철광석을 투입하고 두 시진이 지나면 쇠찌꺼기(슬래그)가 배출된다. 철광석에서 분리된 맥석, 노벽이 녹아서 나온 불순물, 그리고 목탄 등이 섞여 찌꺼기를 이룬 것이다.
이때 배출구를 열어 쇠찌꺼기가 중력과 풍압에 의해 경사면을 타고 흘러 나가게 만들었다.
제련의 성패는 철광석에서 효과적으로 찌꺼기를 분리해 밖으로 내보내는 공정에 달렸다. 근오지에서는 찌꺼기의 분리와 배출을 돕는 첨가제로 조개껍데기를 빻아 용광로에 넣었다.
그런데 연오는 마루치의 비급에 나오는 마법의 가루, 석회를 써보기로 했다. 석회는 석회석을 빻아 불에 태우고 물을 부어서 얻어내는 것이다.
히노미사키 절벽의 반대쪽 산등성이에서 석회석 동굴을 발견했을 때 연오는 뛸 듯이 기뻤다. 불꽃의 연금술을 창시한 해모수 시조가 하늘에서 돕는 것 같았다.
용광로에 석회를 뿌렸더니 과연 철과 불순물의 분리가 한결 쉬워지고 쇠찌꺼기도 부드럽게 흘러서 움직였다. 쇠불아비들은 이 마법의 가루에 감탄했다.
이렇게 네 시진 정도 작업하면 원통로 아래에 쇳덩어리가 생긴다. 그대로 뒀다가 삼사일 후에 노의 앞벽을 헐고 끄집어내면 제련 조업이 마무리된다.
이 쇳덩어리들을 그대로 사용할 수는 없다. 아직 불순물이 많고 강도 역시 약하기 때문이다. 불순물을 정제하고 조직을 강화하는 단야 작업이 필수다.
연오는 무쇠 할배에게 제련 조업을 맡기고, 추수지는 단야 작업을 이끌도록 했다. 태산은 이자미 국주의 협조를 받아 철광석과 석회석을 조달하기로 했다. 쇠불아비들은 인원을 나눠 제련과 단야에 투입하고, 조달은 이즈모 청년들이 함께했다.
드디어 삼족오제철소가 첫걸음을 내디뎠다. 불꽃의 연금술을 완성하기 위한 토대가 만들어졌다.
연오는 이미 다음 단계인 고로(高爐)의 설계까지 마친 상태였다.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제철 공정이다. 해모수 시조가 창시한 천상의 철기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하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다. 실전을 통해 경험치를 쌓고 단계적으로 나아가면 된다.
연오는 어느새 훌쩍 성장했다. 삼족오를 체현한 마루치의 자질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