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군 준오가 암벽길 입구에 나타났을 때는 세오가 기력이 다해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바들바들 떨면서 목에 댄 은장도를 고쳐잡는 딸이 아비는 미우면서도 애처로웠다.
“이거 면목 없게 되었네.”
현장에서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며 부산 떨고 있는 귀섬을 보고 준오가 성큼성큼 다가갔다. 면목 없다는 말은 인사치레에 불과하고 눈으로는 험한 욕을 쏟아내고 있다.
“천군을 뵈오이다. 따님이 아직도 저러고 있으니 걱정입니다. 피도 꽤 흘렀는데 몸 상하기 전에 어서 모셔가야 할 것 같습니다.”
“불초한 여식이 다 된 밥에 재를 뿌렸군 그래. 수색은 어떻게 되고 있는가?”
준오의 관심사는 딸의 안위가 아니었다. 도망간 연오를 붙잡아 제거하는 게 우선이다. 후환을 남겨둔 상태로 권좌에 오르고 싶지 않았다.
“지금 산을 샅샅이 뒤지고 있습니다. 병력을 추가로 투입했으니 오늘 밤까지 기다려 보시지요. 천군의 뜻대로 반드시 그자를 찾아 없애겠습니다.”
그러나 준오의 뜻은 이미 꼬여버렸다. 근오지의 통치자로 명예롭게 추대받으려 했는데 이제 글렀다. 두두리를 무방비로 끌어들인 데다 연오까지 빠져나가고 말았으니 뒷말이 무성할 게 뻔했다.
‘이렇게 된 이상 책임을 묻는 자들이 나오겠지. 수비대장 활보에게 최대한 떠넘기고 서둘러 통치권을 추인받는 수밖에….’
준오는 한숨을 쉬며 기진맥진한 딸을 바라보았다. 이때 수풀 사이로 한 무리의 병력이 나타났다. 화려한 옷차림을 한 청년이 앞장서서 백마를 타고 다가온다.
“여기들 계셨구려. 하마터면 못 찾을 뻔했소.”
“도련님, 예까지 어쩐 일입니까?”
귀섬이 청년을 맞이하며 공손하게 읍했다. 사로국 대신관 석벌휴의 장남, 지밀 공자였다.
“다들 어찌 그리 무심합니까? 진한 최고의 미인을 저렇게 두면 안 되지요.”
창백한 얼굴로 칼 끝을 목에 갖다 댄 세오를, 지밀은 말 위에서 빙글빙글 웃으며 내려다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훑는 끈적한 눈길에 천군의 딸은 진저리 쳤다.
이윽고 준오가 나서서 딸을 얼렀다.
“그만하면 되었다. 아비의 대사를 충분히 망치지 않았느냐? 이제 칼을 내려놓거라.”
세오는 슬픔과 회한이 뒤섞인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다가 칼을 떨어뜨리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정신을 잃고 실신한 것이다.
“이런, 이런, 색시가 무리했나 보군요. 이 몸이 데리러 갈 때까지 모쪼록 몸조리 잘하길 빕니다, 장인어른.”
지밀은 천군에게 예의를 가장해 야유를 보내고 말머리를 돌렸다. 준오는 불쾌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대신관의 힘을 업으려면 딸을 시집보내 환심을 사야 한다.
귀섬은 실없는 웃음 속에 감춰진 지밀의 잔혹한 성정을 떠올리며 속으로 혀를 찼다. 그의 첫 번째, 두 번째 부인은 죽었다. 세 번째가 될 저 계집은 견딜 수 있을까?
왜의 천반선(天磐船)은 밤바다를 가르며 미끄러지듯이 나아갔다. 이름처럼 널찍한 바위가 둥둥 떠가는 것 같다. 돛은 순풍을 잔뜩 받아 만삭 여인의 배처럼 부풀어 올랐다.
연오는 갑판 난간에 팔을 얹고 가만히 노래를 불렀다.
“하늘과 바다가 껴안는 곳에서 / 해와 달이 만나 새날을 여니 /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노래를 부르노라면 밤하늘에 세오가 둥실 떠오른다. 보고 싶어 미칠 것만 같다. 거북아 거북아, 주문을 외우면 그녀를 내게로 소환할 수 있을까? 하늘과 바다가 서로 끌어안는 수평선처럼 우리는 다시 하나가 될 수 있을까?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시오?”
천반선의 주인 진쾌가 갑판에 나왔다가 연오를 보고 말을 걸었다.
진(秦)씨 일족은 중국 전국시대 말기에 전쟁과 노역을 피해 삼한으로 흘러왔다. 그중 일부가 왜로 건너가 상인으로 자리 잡았다. 그 후 진씨 상단은 삼한과 왜를 오가며 중개인 노릇을 해왔다.
진쾌는 왜가 신들의 땅이라고 했다. 원시의 신들이 산천초목에 깃들어 영험한 기운을 뿜어낸다고 한다. 정령이 조화를 부리고 신수(神獸)가 출몰하며 주술이 활개 친다는 것이다.
왜는 4개의 큰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해도는 사로국에 복종하길 거부한 진한 사람들이 많이 건너가서 정착한 곳이다. 이즈모를 중심으로 여러 나라가 연합체를 이루고 있다.
북해도는 사시사철 눈과 얼음이 뒤덮여 있는 곳이다. 특이한 점은 신령한 늑대 무리가 주인 행세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파나에 모여 사는데 외부인들을 꺼린다고 한다.
동해도는 수목이 울창한 삼림지대를 이루고 있다. 중심지는 신비로운 전설이 깃든 봉래도다. 400년 전 진시황의 명으로 불로초를 구하러 온 도사 서복이 지금도 살고 있단다.
가장 번창한 섬은 남해도다. 중국, 삼한, 흉노, 인도와 교역하고 인구도 많다. 아홉 개 나라가 다투다가 몇 해 전 야마타이의 무녀왕 히미코가 통합해 신통력으로 다스리고 있다.
연오 일행이 향하는 곳은 바로 서해도의 이즈모다. 진쾌의 소개에 따르면 이주민과 원주민이 힘을 모아 새로운 문명을 일구고 있는 역동적인 나라다.
문명을 추동하는 힘의 원천은 뭐니 뭐니 해도 철기다. 이즈모 사람들은 우수한 철기를 제작하기 위해 삼한에서 뛰어난 대장장이를 초빙하기로 했다.
그들은 이 임무를 진씨 상단의 천반선에 의뢰했다.
진쾌는 먼저 가락국으로 향했다. 금관 철기는 평판이 좋아 바다 건너에서 주문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솜씨 좋은 장인들은 모두 나라에 묶여 있었다. 인재 유출을 막는 바람에 허탕 치고 말았다.
다음 행선지는 근오지였다. 까마귀철막의 삼족오철정은 근래 삼한에서 으뜸으로 치는 교역품이다. 삼족오철정을 만드는 쇠불아비들을 이즈모에 데려간다면 틀림없이 기뻐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진쾌는 며칠 전 근오지에 들어가 천군 준오에게 쇠불아비 초빙 의사를 전했다. 하지만 준오는 거절했다. 사로국 대신관 석벌휴와 비밀리에 약조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진쾌가 고심하고 있을 때 뜻밖의 제보가 날아들었다. 근오지에서 곧 변고가 일어나 대장장이들이 피신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하늘이 내려준 기회였다. 진쾌는 사로국과의 교역을 명목으로 근오지 남쪽 아진포에 머물면서 정보원들을 풀어 큰까막골의 동향을 하나도 빠짐없이 알아냈다.
결국 연오와 세오의 혼인날 그 일이 벌어졌다. 연오와 쇠불아비들이 구름산으로 도망쳤다는 소식을 듣고, 진쾌는 한밤중에 출항해 도기야로 향하였다.
근오지의 후계자와 대장장이들이 왜의 ‘바위배’에 오르게 된 내막이다.
연오는 진쾌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 선실로 돌아왔다. 초대 마루치 대오가 남긴 죽간이 탁자 위에 놓여 있다. 등잔에 불을 밝히고 죽간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을 다시 읽었다.
불꽃의 연금술을 완성하려면 해모수의 신물을 획득해야 한다. 오래 전에 왜로 건너간 오우관과 오룡거를 찾아내고, 하늘이 내린 운철로 용광검을 다시 만드는 일이다.
연오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고 앞일을 그려보았다.
같은 시각, 천반선의 주인 진쾌는 선창을 열고 어딘가로 연락용 매를 날렸다. 훈련받은 바다매는 먹구름이 뭉게뭉게 일고 있는 남쪽 하늘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다음 날 아침 야마타이의 무녀왕 히미코가 서신을 받아보고 생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