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경률의 노래하는 한국사 (46)
“손바닥을 마주 쳐서 소리를 내잡시면 / 한 손바닥만으로는 절대로 안 되옵고 / 두 손을 마주 쳐야 되는 이치이올시다. / 문무대왕님과 김유신 장군님이 / 두 손의 손뼉처럼 신라 통일 이루시고 / 인제는 그 넋 담아 이 합죽(合竹)이 되었니다. / 폐하시여 이 합죽으로 피리를 만드시와 / 이 뜻을 그 가락에 고이 담아 전하시면 / 신라는 영원토록 살아서만 가오리이다.”(서정주, ‘만파식적이란 피리가 생겨나는 이얘기’,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
옛날 옛적 신라에 신비로운 피리가 있었다. 피리를 불면 싸움을 건 적군이 물러가고 아픈 병이 씻은 듯이 나았으며, 가뭄이 든 땅에 단비가 내리고 물난리를 일으킨 장맛비가 뚝 그쳤다. 풍랑이 일렁이던 바다도 바람이 잦아들고 파도가 잠잠해졌다. 사람들의 근심 걱정을 풀어주고 나라를 평안하게 하는 보물 피리였다. 조화로운 소리로 태평성대를 이루게 하니 이 피리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하였다.
만파식적은 ‘합죽(合竹)’으로 만든 피리다. 합죽, 하면 떠오르는 물건이 있다. 합죽선이라 하여 얇게 깎은 대나무 살 위에 종이나 천을 발라서 접었다 폈다 하게 만든 부채다. 합죽선으로 유명한 고장은 전통문화의 도시 전주인데 전주월드컵경기장 지붕은 이 부채를 형상화한 것이다. ‘합죽선(合竹扇)’이라는 이름은 부채를 접으면 대나무 살이 합쳐지기 때문에 붙여졌다. 이는 <삼국유사> 기이 편 ‘만파식적’ 조에서 의미를 따온 것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나라를 평안하게 하는 보물 피리, 만파식적이 만들어진 것은 신라 제31대 신문왕(재위 681~692) 때의 일이다. 그는 당나라를 물리치고 삼국통일을 완성한 문무왕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위업을 계승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신문왕은 즉위하자마자 큰 위기를 맞는다. 왕의 장인 김흠돌이 진골 귀족들을 규합해 반역을 꾀한 것이다.
“역적 흠돌, 흥원, 진공 등이 흉악하고 간사한 자들을 불러들이고 궁중의 근시(近侍)들과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 이에 군사들을 불러 모아 제거하고자 했더니 산골짜기로 도망치거나 궁궐 뜰에 와서 항복했다. 삼사일 사이에 역적의 우두머리들을 소탕하고 잔당까지 샅샅이 찾아내 모두 처형했다. 요망한 무리가 말끔히 제거되었으니 소집한 병마를 돌려보내고 사방에 포고하여 이 뜻을 알게 하라.”(<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 원년)
681년 8월 16일 신문왕이 역적 세력을 숙청하고 내린 교서다. 김흠돌은 삼국통일 전쟁에서 크게 활약하고 문무왕 대에 조정의 요직을 차지한 권신이다. 신문왕은 태자 시절 김흠돌의 딸을 비로 맞이했다. 왕실에서 국혼(國婚)으로 손잡아야 할 만큼 영향력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꾸로 보자면 경계의 대상이기도 했다. 왕권을 넘볼 수 있는 세력가였기 때문이다.
권력 내부의 알력은 문무왕(재위 661~681) 때부터 심상치 않았다. 전쟁 기간에 잠복해 있던 왕권의 정통성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문무왕의 아버지 김춘추는 쫓겨난 임금 진지왕의 손자였다. 그는 진골이었지만 성골의 씨가 마르자 김유신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다(태종무열왕). 다른 진골 귀족들이 봤을 때는 결격 사유가 적지 않았다. 폐주의 혈통인 데다 왕비(김유신의 동생 문명왕후)가 가야계였기 때문이다.
문무왕과 신문왕으로 이어진 무열왕계 왕권은 삼국통일 전쟁이 끝나자 범내물왕계(김씨 왕위 세습을 시작한 내물왕의 후손들) 진골 귀족들에게 도전을 받았다. 그나마 문무왕은 삼국통일을 완성한 위대한 군주였기에 어쩌지 못했지만 681년 7월 1일 대왕이 세상을 떠나자 진골 세력은 노골적으로 야욕을 드러냈다. 그 중심에 김흠돌이 있었다.
신문왕도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젊은 왕은 즉위하자마자 김흠돌의 딸인 왕비를 쫓아냈다. 오랫동안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를 붙였다. 화백회의를 주관하는 상대등도 (모반에 연루된) 김군관을 물러나게 하고 진복으로 교체하였다. 그러고 나서 8월 8일 김흠돌과 진골 귀족 세력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자 준비한 병력을 소집하여 남김없이 소탕한 것이다. 문무왕 사후 한 달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만파식적은 그 이듬해(682)에 만들어졌다. 숙청의 피바람이 지나가고 나라의 안정과 화합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였다. <삼국유사>는 그 일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그해 5월에 신령스러운 징조가 나타났다. 동해 가운데 있던 작은 산 하나가 물결을 따라 감은사 쪽으로 떠내려온 것이다. 산의 형세는 거북의 머리 같고, 그 위에는 대나무 한 줄기가 서있었다. 그 대나무는 기이하게도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합쳐져 하나가 되었다. 신문왕이 배를 타고 그 산에 들어갔더니 문득 용이 나타나 검은 옥대(玉帶)를 바쳤다. 왕은 용을 영접하고 앉아서 물었다.
“이 대나무와 산이 갈라지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하는데 무엇 때문인가?”
“비유컨대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는 합쳐진 후에야 소리가 납니다. 성왕(聖王)께서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릴 좋은 징조입니다. 합쳐진 대나무를 가지고 가서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할 것입니다. 대왕의 아버님은 바닷속의 큰 용이 되셨고, 김유신 공은 천신(天神)이 되셨는데 두 성인께서 뜻을 모아 이처럼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보배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신문왕은 놀랍고 기뻐 오색 비단과 금옥(金玉)으로 보답하고 사람을 시켜 대나무를 베게 하였다. 왕이 배에 올라 뭍으로 나오자 산과 용은 홀연히 사라졌다. 행차에서 돌아온 왕은 합쳐진 대나무, 곧 합죽(合竹)으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 천존고(天尊庫)에 간직했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나고 병이 나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는 개었으며, 바람이 잦아들고 물결이 평온해졌다. 이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삼국유사>의 상징적 화법은 해독하는 재미가 있다. 신문왕 즉위 직후에 벌어진 김흠돌의 난과 무열왕계 왕권에 대한 진골 세력의 불만은 만파식적 이야기에 숨은 의도가 있으리란 추측을 하게 만든다. 만약 의도적으로 지어내 퍼뜨린 이야기라면 목적이 있을 터. 진골들에게 전쟁 때처럼 다시 힘을 합쳐 나라를 평안하게 해보자는 메시지를 보낸 것인지도 모른다. 신령한 피리로 왕실의 신성한 권위를 널리 홍보하려 했을 가능성도 높다.
더구나 만파식적은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 공이 뜻을 모아 보내준 보배라고 했다.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두 성인이 나라를 사랑하여 내려준 보물 피리다. 신의 반열에 오른 호국 영령을 이야기에 끌어들임으로써 진골은 물론 신라 사람 모두가 공감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것이 신문왕과 그 측근들의 스토리텔링 전략에서 나온 작품이라면 대성공을 거둔 셈이다.
합죽으로 나라를 평안케 하는 피리를 만든 것처럼 신문왕은 통합의 기반 위에서 개혁을 힘차게 추진했다. 지방 통치 체제를 9주 5소경으로 정비해 지역 통합을 도모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했다. 백제와 고구려 유민에게 관등을 부여하여 민족 융합에 박차를 가하고 인적 자원을 확보했다.
개혁은 무열왕계의 왕권 확립과 직결되었다. 왕은 중앙 군사 조직을 귀족들의 지분이 큰 6정에서 국왕 직속의 9서당으로 개편했으며 친위부대인 시위부도 보강했다. 왕권을 뒷받침하는 관료를 양성하기 위해 국학을 설치해 유학 교육을 장려하고, 위화부(位和府)에 2명의 영(令)을 두어 관리를 선발하고 인사를 맡아보게 했다.
토지개편에도 착수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경제 개혁은 얽히고설킨 이해관계가 걸려 있어 추진하는 데 걸림돌이 많다. 신문왕은 관료전을 실시하여 국왕의 수족인 관료들이 현직에 있는 동안 생계를 유지하고 입지를 다질 수 있도록 했다. 대부분의 토지를 소유하고 세습했던 귀족들은 불만이 컸을 것이다. 진골의 경제 기반을 약화시키고 토지에 대한 국가의 지배를 확대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신문왕의 치세는 통합과 개혁의 기조 속에서 통일신라의 국가 체계를 갖추는 성과를 거뒀다. 진골들도 섣불리 반기를 들지 못했다. 반란은 강경하고 냉혹하게 진압하지만 문화적 영향력도 교묘히 활용하는 군주다. ‘소프트 파워’와 ‘하드 파워’를 겸비한 왕이 국정의 주도권을 잡은 이상 귀족들은 협조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나 무열왕계 왕권에 대한 진골 세력의 도전은 잠시 숨고르기를 한 뒤에 또 다시 이어졌다. 신라 골품제에서 내물왕의 후손은 세대와 상관없이 진골 지위를 가졌다. 세월이 흐를수록 숫자가 불어났다. 17관등 중 1등 이벌찬부터 5등 대아찬까지 고위직은 진골만 차지할 수 있었다. 머릿수가 계속 늘어났으므로 중하위직도 진골의 비중이 점점 높아졌다. 그들의 영향력은 갈수록 막강해졌다. 왕권에 대한 도전도 더욱 격렬해졌다.
신문왕이 세상을 떠나고 효소왕(재위 692~702)이 즉위하자 선왕에게 머리를 조아렸던 진골 귀족들이 다시 들고 일어났다. 그 양상이 <삼국유사> 탑상 편 ‘백률사’ 조에 상징적으로 담겨 있다. 천존고에 보관 중이던 만파식적을 잃어버렸다가 기적적으로 되찾은 사건이다. 피리를 분실했다는 건 진골 세력의 도전으로 정치적 혼란이 빚어졌다는 것을 암시한다.
실제로 모반이 일어났다. 효소왕은 작은 할아버지인 개원(태종무열왕의 아들)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여(695) 전제적인 왕권을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진골 귀족들은 강력히 반발했다. 결국 효소왕 9년(700) 5월 이찬 경영이 반역을 꾀하다가 처형당했다. 이때 실권을 쥐고 있던 중시 순원도 모반에 연루되어 쫓겨났다. (성덕왕 때 복권된 순원은 2대에 걸쳐 국왕의 장인이 되어 권력을 휘두른다.)
만파식적과 같은 신물(神物)은 왕권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신라의 보물창고에는 또 어떤 국보가 보관되어 있었을까?
<삼국유사>는 신라의 세 가지 보물로 황룡사 구층목탑과 장육존상, 그리고 진평왕의 천사옥대를 거론했다. 이 가운데 보물창고에 둘 만한 것은 천사옥대(天賜玉帶)이다. 이것은 하늘이 내려준 옥대라고 한다. 진평왕이 즉위한 해(579)에 천사(天使)가 궁전 정원에 내려와 상황(上皇)의 명이라며 전했다는 것이다. 왕은 큰 의례와 제사가 있으면 항상 이 옥대를 허리에 차고 주관했다.
신라 제26대 진평왕은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아버지 동륜태자는 진흥왕의 후계자였으나 뜻하지 않게 일찍 죽었다(572). 보위는 숙부 진지왕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임금이 주색에 빠져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나라 사람들이 화백회의를 열어 몰아냈다. 뒤이어 즉위한 진평왕은 ‘모양 빠진’ 왕권을 그럴듯하게 포장할 필요가 있었다.
진평왕이 쓴 방도는 직계가족을 인도 석가족과 동일시하여 왕실을 불교적으로 신성화하는 것이었다. 왕의 이름은 석가모니 아버지와 같은 백정(白淨, 정반왕)이라 하고 왕비의 이름도 석가모니 어머니의 것을 따서 마야 부인(摩耶夫人)이라고 했다. 왕의 아우들도 백반(伯飯), 국반(國飯)이라고 불렀는데 정반왕의 동생들 이름과 같았다. 딸인 선덕여왕의 이름 덕만(德曼), 진덕여왕의 이름 승만(勝曼)도 불경에서 뽑은 것이다.
학계 일각에서는 진평왕이 진골 위에 ‘성골(聖骨)’이라는 신성한 골품을 창출한 것으로 보고 있다. 천사옥대의 출현 역시 왕권을 거룩하고 성스럽게 만드는 작업의 일환으로 보인다. 단, 이것은 불교보다 도교적인 색채가 짙다. 옥대를 전한 천사는 하늘의 사자로 도가에서 쓰던 명칭이고, 이를 명한 상황도 도가의 최고신 상제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진평왕 대에 왕권의 신성화 작업이 다각적으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천사옥대는 신라가 망할 때까지 보물창고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920년에 신라 사신 김율이 고려에 이르자 왕건은 성대(聖帶)를 거론하며 아직 있느냐고 물었다. 성대는 성스러운 옥대로 진평왕의 천사옥대를 말한다. 김율은 고려왕의 관심사라 여겨 이듬해 신라 제54대 경명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어리둥절했다. (박씨 왕이라 그런지) 성대가 무엇인지 몰랐던 것이다. 신하들도 금시초문이었다.
천사옥대의 존재를 가르쳐준 건 황룡사의 노승이었다. 경명왕은 창고를 열어 신물을 찾게 했는데 아무리 뒤져도 나오지 않았다. 다른 날 왕이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제사를 지낸 후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그 띠는 금과 옥으로 장식되어 있었으며, 매우 길어 보통 사람이 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삼국사기> 신라본기 경명왕 5년)
신라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경순왕 김부는 935년 11월 고려에 항복하고 왕건에게 천년왕국을 넘겼다. 이듬해 후백제가 멸망하며 고려는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했다. 937년 5월 김부는 금을 상감하고 옥을 넣은 네모진 허리띠를 태조에게 바쳤다. 길이가 십위(十圍)에 이르고 대구(帶鉤, 장식물)가 62개였다. 신라에서 보물로 간직한 지 거의 400년이 되었는데 세상에서는 성제대(聖帝帶)라고 부른다고 했다.(<고려사> 세가 태조 20년)
그것은 진평왕의 천사옥대였다. (진품이 아니라 새로 만들었다고 해도 그건 천사옥대여야 한다.) 왕건은 천년왕국 신라의 정통성을 고려가 물려받았음을 널리 알리는 상징물로 성스러운 황제의 허리띠, 천사옥대를 취한 것이다. 신물은 그런 것이다.
만파식적은 천사옥대와 달리 실존 여부가 불투명하다. 같은 신라의 국보라도 설화적 성격이 더 강하다. 또 천사옥대가 보여주는 것이라면, 만파식적은 들려주는 것이다. <삼국유사> ‘만파식적’ 조에 “성왕(聖王)께서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릴 좋은 징조”라고 했다. 만파식적은 물질적 실체가 없지만 다스림의 이상으로 후세에 전해졌다.
성인 공자(孔子)는 ‘악교(樂敎)’라 하여 음악으로 천하를 교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한 교재로 노래책을 지었다. 주나라 때 민간에서 널리 부른 노래를 풍(風)이라 하고, 궁중에서 손님맞이나 연회용으로 부른 노래를 아(雅)라 하며, 각 제후국에서 종묘의 제사를 지낼 때 부른 노래를 송(頌)이라 하였다. 공자는 전국에서 수집한 풍아송(風雅頌) 1천여 수 가운데 305수를 뽑아 <시경(詩經)>을 펴냈다. 그것은 원래 노랫말과 악곡을 수록한 가요집이었다.
‘지음(知音)’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내는 소리에는 그이의 속마음이 담겨 있다. 귀를 기울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한나라의 전성기를 연 무제는 악부(樂府)라는 관청을 두고 방방곡곡 관리를 파견하여 민간의 노래를 수집했다. 노래에 담긴 민심을 알아내고 이를 정사에 반영하기 위함이었다.
거꾸로 소리를 통해 사람의 마음을 다스릴 수도 있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訓民正音)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글에 바른 소리를 담아 백성을 교화하려고 한 것이다. 여기서 바른 소리는 참된 말이다. 올바른 가르침이자 날카로운 비판이며 진심 어린 위로이자 세상을 바꾸는 함성이다. 바른 소리는 근심 걱정을 풀어주고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 만파식적의 진정한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