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은 이색이 문안을 여쭈러 온 집안 젊은이에게 물었다. “내가 산으로 유람을 좀 가고 싶은데 같이 가겠는가?” 두 사람은 말을 타고 산골짜기로 들어갔다. 인적 없는 고요한 곳에 이르자 목은이 말했다. “사실 여기 온 것은 울고 싶었기 때문이네. 자식을 잃은 뒤로 가슴 속의 울분을 풀지 못했거든.” 그러고는 통곡하는데 종일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성현, <용재총화(慵齋叢話)> 권3)
고려 말의 대학자 목은(牧隱) 이색(1328~1396)은 어째서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 통곡했을까?
이색은 신진 사대부들에게 성리학을 가르치고 스승으로 추앙받은 당대 최고 지식인이었다. 고려를 지키려 한 절의파도, 조선을 세우려 한 역성혁명파도 모두 그의 문하에서 나왔다.
하지만 목은은 우왕과 창왕의 옹립에 관여하는 바람에 역성혁명의 적으로 몰렸다. 한때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정도전과 조준은 이성계의 책사가 되어 스승을 향해 칼을 겨눴다.
조선 건국 과정에서 이색은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글재주가 뛰어났던 둘째 아들 이종학은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런데 이 죽음에는 후일 논란을 부르는 비사가 숨어 있었다.
“장(杖) 일백 대 이하를 맞은 사람들이 모두 죽다니 무슨 까닭인가?”(<태조강헌대왕실록> 1392년 8월 23일, 이숭인 이종학 우홍수의 졸기)
태조 이성계가 이종학, 이숭인, 우홍수 등이 형벌을 받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노하여 한 말이다. 1392년 7월 17일 개경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른 지 한 달만의 일이었다.
조선의 창업자가 분노한 것은 정도전, 남은 등 측근들이 자신을 속이고 그들을 죽였기 때문이다. 법에 의한 정당한 죽음이 아니었다. 고의로 심한 형벌을 가해 살해한 것이었다.
발단은 1390년에 벌어진 윤이·이초의 옥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윤이와 이초라는 자가 명나라 황제 주원장에게 이성계와 공양왕이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무고(誣告)했다는 사건이다. 실권자 이성계의 측근들은 이를 빌미로 반대 세력을 무더기로 투옥하고 고문했다. 문하시중을 지낸 이색과 수제자 이숭인, 둘째 아들 이종학 등이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이 옥사는 역효과를 내고 말았다. 이성계에게 호의적이었던 정몽주가 등을 돌리고 역공에 나섰기 때문이다. 정몽주는 윤이·이초의 무고가 조작된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성계 측근들이 역성혁명의 장애물을 제거하고자 없는 사실을 꾸며 옥사를 일으켰다고 본 것이다. 그 후 정몽주가 수시중이 되었고 정도전, 조준 등은 탄핵을 당해 거의 죽을 뻔했다. (윤이·이초의 옥사에 대해서는 2022년에 낸 나의 저서 <모함의 나라>에 상세히 담았다.)
이색, 이숭인, 이종학 등은 구사일생으로 풀려났지만 1392년 고려의 버팀목 정몽주가 쓰러지며 또 위태로운 처지가 되었다. 이성계가 즉위하자 측근들은 윤이·이초 사건을 다시 끄집어내 이색 등 10여 명을 죽이려고 했다. 고려 부흥의 싹을 잘라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을 구명한 것은 태조 이성계였다. 조선의 창업자는 ‘호생지덕(好生之德)’을 펼치고자 했다. 임금이 죽이기보다 살리는 것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야 고려 멸망으로 흩어진 민심을 수습할 수 있다. 나아가 학문과 문장이 뛰어난 인재들을 등용하려는 마음도 컸다.
태조는 원로대신 이색, 우현보, 설장수를 사면하고 이숭인, 이종학, 우홍수 형제 등 제자와 자제들은 장형(杖刑, 곤장으로 볼기를 치던 형벌)에 처하는 선에서 매듭지으라고 했다. 하지만 정도전은 주군의 뜻을 온전히 받들지 않았다.
“곤장 일백 대를 맞은 사람은 마땅히 살지 못할 것이다.”(<태조강헌대왕실록> 1392년 8월 23일, 이숭인 이종학 우홍수의 졸기)
정도전이 남은과 (유배지로 형벌을 집행하러 가는) 황거정, 손흥종 등에게 몰래 이른 말이다. 죄인들에게 장형을 시행하되 살지 못하게 하라는 뜻이다.
전라도 나주로 간 황거정은 곤장으로 이숭인, 우홍수 형제의 볼기가 아니라 등골을 치게 했다. 길고 무거운 나무 형구로 등골을 맞으면 척추뼈가 부러지고 내장이 상한다. 장형을 받은 죄인들은 곧 사망하고 말았다. 사실상 때려죽인 것이다.
손흥종도 경상도 경주로 가서 곤장으로 이종학의 등골을 치도록 했다. 다행히 판관 김여지가 몰래 형리에게 일러 ‘법 밖의 형벌’을 금했다. 이종학은 목숨을 구했지만 유배지로 가다가 손흥종이 보낸 사람에게 목이 졸려 살해되었다.
황거정과 손흥종은 형벌을 집행한 게 아니라 살해 임무를 완수한 것이다. 비밀 지령을 내린 인물은 정도전과 남은이라고 실록은 콕 집어 지목하고 있다.
태조는 처음에는 몰랐다가 뒤에 내막을 전해 듣고 크게 탄식했다. 측근들이 임금을 기만하고 마음대로 사람을 죽였으니 화도 났을 것이다. 하지만 벌하지는 않고 덮어줬다. 비상한 시기에 주군과 새 나라를 위해 화근을 제거한 것뿐이라는데 어쩌겠나.
아들을 잃은 이색은 애통했지만 마음껏 슬퍼하지도 못했다. 그는 1396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까지 정도전의 위세가 하늘을 찔렀다. 두렵기도 하거니와 아들을 죽인 옛 제자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싫었을 것이다. 목은이 골짜기로 들어가 남몰래 통곡한 까닭이다.
이색의 한을 풀어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태종 이방원이었다.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과 남은, 세자 방석 등을 죽이고 집권했다. 태종은 왕자 시절 앞길을 막고 자신을 죽이려 한 정도전을 용서하지 않았다. 즉위 후에도 깎아내리고 흠집 냈다. 정도전과 남은이 임금을 속이고 이종학과 이숭인을 살해한 사건도 사헌부 탄핵이 올라오자 공론화하였다.
“정도전·남은이 사사로운 감정을 품고 몰래 사주하여 죄 없는 사람을 잘못 죽였으니, 이것이 신하의 도리인가? 내가 이것을 죄주는 것은 이숭인·이종학을 위하여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천하 만세의 계책을 위함이다.”(<태종실록> 1411년 8월 11일)
여기서 태종이 말한 사사로운 감정이란 정도전을 겨냥한 것이다. 정도전이 이숭인과 이종학을 죽게 한 것은 뛰어난 글재주를 시기했기 때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홍수 형제의 경우는 더욱 사무친다. 정도전의 외할머니가 우씨 집안 여종 소생이라며 그들이 신분을 문제 삼고 멸시했기에 원한을 갚은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정도전은 정말 시기심이나 원한 같은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죄 없는 사람들을 죽였을까? 아니면 이 또한 정도전에 대한 이방원의 사감(私感)이 빚은 억측일까?
인간(人間) 세상에서 사람(人) 사이(間)의 감정이 파문을 일으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렇다 해도 명분의 끈은 놓지 않는 것이 신상에 이롭다.
태종은 황거정과 손흥종 등이 임금을 속이고 마음대로 사람을 죽인 죄를 소급해 다스렸다. 가산을 몰수하고 유배를 보내 살해된 이들의 원통함을 풀어준 것이다. 단, 개국공신이라 하여 죽이지는 않았다.
정도전을 역적으로 몰았지만 후손들을 금고하지 않은 것도 그래서다. 천하의 이방원이라 해도 조선 건국에 드리운 그의 그림자를 지울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