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모의 주역들은 마침 궁전 후원에 모여 있었다. 연못가에 둘러 앉아 앞으로 이즈모를 어떻게 이끌고 나갈지 의논했다.
“지금 왜에는 임금을 세우고 나라를 일으키는 곳이 늘어나고 있어요. 우리도 세력을 키우려면 강력한 구심점이 필요해요.”
이자미 국주가 화두를 꺼냈다. 그녀는 평소 완곡하게 말하는 편이지만 중대사는 말을 돌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소신을 밝혔다.
“연오 님은 저를 비롯해 우리 이즈모 사람들을 구해 주셨어요. 하늘이 내린 신력을 모두들 보았죠. 그러니 임금님이 돼주세요.”
뜻밖의 제안에 연오는 낯을 붉히며 손사래를 쳤다.
“이방인에 불과한 제가 임금이라니요? 말도 안 되는 얘깁니다. 당연히 국주 님이 임금을 해주셔야 합니다. 그것이 순리입니다.”
이자미의 동생 이자기는 입을 꾹 다물고 지켜보았다. 무쇠 할배와 태산도 말이 없었다. 어색한 공기가 흐르자 호공이 슬며시 논의를 거둬들였다.
“국주가 왜 이런 제안을 하는지 알겠네만 이즈모 사람들의 마음을 좀 더 살핀 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을 걸세.”
이자미는 호공의 말에 수긍하고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난처한 입장이었던 연오도 다행이란 듯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때 성문을 지키는 수문장이 달려와 누가 연오를 찾아왔다고 전했다. 그가 데리고 온 사람은 에미시 족장의 딸 하루카였다.
후원에 들어선 하루카에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녀가 응시하고 있는 건 단 한 사람, 연오 뿐이었다.
“도와주세요. 장로들이 반란을 일으켰어요. 우리 아빠 좀 구해주세요.”
다짜고짜 도와달라는 처녀가 연오를 당혹스럽게 했다. 맡겨 놓은 물건 찾으러 온 사람처럼 도움을 구하고 있다.
연오를 만나러 오면서 하루카는 생각했다.
간절하게 매달려볼까?
아니야!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 사람 앞에서는 도도하고 싶다.
그래야 하루카다!
자초지종을 듣자 호공이 도와줄 것을 권했다.
“에미시의 내분은 우리에게 좋을 게 없지. 우타리 족장은 패배를 추스르고 나서 대화할 뜻을 비쳤네. 저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면 족장을 돕는 게 낫지 않겠나?”
말은 이렇게 했지만 호공에게는 또 다른 속셈이 있었다. 보아하니 족장의 외동딸이 연오에게 푹 빠진 것 같다. 만약 산채를 쳐서 우타리를 구원할 수 있다면….
호공은 이즈모와 에미시의 결합을 염두에 뒀다. 구원을 계기로 연오가 족장의 딸과 혼인하면 두 세력은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럼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연오를 임금으로 추대할 명분이 생긴다. 여세를 몰아 왜의 서해도를 크게 아우를 수도 있다.
생각할수록 그림이 좋다.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그런 호공의 셈법을 연오는 알 도리가 없었다. 다만 하루카가 가엽기는 했다. 도도하게 굴지만 기댈 언덕이 없는 처지다. 바다를 건너온 청년은 문득 두고 온 세오의 얼굴을 떠올렸다.
에미시 족장의 산채에서는 잔치가 여러 날 벌어졌다. 장로 쿠아리는 전사들에게 술과 음식을 배불리 먹였다. 산채 전사들은 노래하고 춤추며 젊은 장로를 칭송했다.
쿠아리는 패전으로 풀이 죽은 전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리려고 했다. 그의 야망은 단지 족장 자리를 차지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전투종족 에미시의 힘을 한데 모아 크게 떨치는 것이 선조들이 부여한 사명이라고 믿고 있었다.
잔치가 열리는 동안 산채를 지키는 병력은 쿠아리가 데리고 온 씨족 전사들이었다. 족장의 산채는 이즈모에서 가까운 큰산에 자리 잡고 있는데, 쿠아리의 전사들은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얼음산에서 왔다.
“이거 좀 먹고 일 보세요.”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서문을 지키던 얼음산 전사들의 마음을 녹였다.
묘령의 처녀들이 목책으로 다가와 머리에 인 함지박을 내려놓았다. 멧돼지 머릿고기와 사슴 수육이 푸짐하거니와 기장 술의 알싸한 향기가 코끝을 찔렀다.
“누가 당신들을 여기 보냈소?”
수문장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예쁘장하고 귀티 나는 처녀가 앞으로 나섰다.
“저희는 당나무의 무녀들입니다. 장로님들이 여러분의 노고를 잊으면 안 된다고 술과 음식을 보냈습니다.”
무녀의 말에 수문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취식을 허락했다. 잔치를 뒤로 하고 산채를 지켜야 했던 전사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잠시 후 전사들은 몽둥이로 뒤통수를 맞은 듯 어질어질하여 픽픽 쓰러졌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고 별들이 쏟아져 내렸다.
처녀들은 잠가놓은 서문의 빗장을 풀었다. 하루카와 여전사들이 비밀통로로 잠입하여 전사들을 잠재우고 문을 연 것이다.
—쿵쿵쿵
—엉! 엉!
잠시 후 땅을 흔드는 발소리와 함께 큰산의 불곰들이 울부짖으며 문으로 들이닥쳤다.
선두에 선 어미 곰이 새끼의 피 냄새를 맡고 대족장의 장막으로 무리를 이끌었다. 며칠 전 이요만테 의식에 희생된 새끼 불곰의 어미였다.
전날 어미 곰은 동굴로 찾아온 삼족오의 정령을 만났다. 정령은 황혼에 물든 하늘에 신령한 빛으로 일렁이는 환영을 띄웠다.
동면에 든 보금자리에서 자기 새끼를 납치하고, 신들의 나라로 돌려보낸다며 잔인하게 살해하는 에미시 전사들의 모습이었다.
어미는 울부짖으며 온 산을 헤맸다. 큰산의 불곰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수십 마리가 떼를 이뤄 환영 속의 산채로 행진했다.
어미 곰은 새끼의 복수를 강렬히 열망했다. 서문을 지난 불곰들은 앞을 가로막는 전사들에게 사납게 달려들었다. 파죽지세였다.
장로 쿠아리와 주술사 아차포는 포효하는 짐승 소리를 듣고 장막에서 나왔다. 곰의 난입으로 잔치는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새끼의 해골을 머리에 쓰고 모피를 두른 주술사의 차림새를 보자 어미 곰이 흥분했다. 미쳐 날뛰면서 아차포에게 덤벼들었다.
“태초의 어둠이여. 아라하바키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어둠의 손을 쥐어 저 짐승들을 멸하라.”
어미 곰은 슬프게도 주술사에게 닿지 못하고 어둠의 손에 잡혀 피곤죽이 되었다. 불곰들이 차례로 피를 쏟아내며 터져 죽는 모습을 보고 남은 곰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아차포는 불곰 떼가 사라져간 어둠의 심연을 향해 소리쳤다.
“네 짓이구나. 대장장이 꼬맹이야, 숨지 말고 나오거라.”
이윽고 어둠 속에서 삼족오의 화신이 걸어 나왔다. 연오의 뒤를 따라 하루카와 이즈모 결사대도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