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의 유배와 죽음, 세조실록이 감춘 진실

권경률의 노래하는 한국사 (48)

by 권경률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청구영언>)


의금부 도사 왕방연이 ‘고운 님’ 잃은 심정을 가슴 아프게 노래한 시조다. 여기서 고운 님은 조선 제6대 왕 단종을 가리킨다. 가집 <청구영언>에서는 그가 단종을 머나먼 유배지 영월로 호송하고 돌아가다가 냇가에서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애통한 심정을 흐르는 냇물에 투영하여 “저 물도 내 마음 같아서 울며 밤길을 간다”고 하였다. 현대어로 번역해도 어린 임금을 사랑하고 연민하는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세조실록>에는 왕방연이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세조는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하고 강원도 영월로 유배 보낼 때 첨지중추원사 어득해 등에게 명하여 군사 50여 명을 거느리고 호송하게 했다.(1457년 6월 21일) 의금부 도사 왕방연이 공식 기록에 등장한 것은 그로부터 240여 년 뒤였다. 단종을 임금으로 복위시킨 숙종이 그의 이름을 꺼내면서 쉬쉬하던 옛일을 직접 거론한 것이다.


“당시 금부도사 왕방연이 영월에 도착했지만 머뭇거리면서 들어가지 못했다. 뜰 가운데 있을 때 단종대왕께서 관복을 갖추고 마루로 나오셔서 온 이유를 하문하셨으나, 도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왕명을 받고 온 신하가 그러고 있자 평소에 모시던 공생(貢生, 지방 관아의 통인) 하나가 차마 하지 못할 일을 자청했다”(<숙종실록> 1699년 1월 2일)


1.jpg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서 단종이 청령포로 유배 가는 장면. / 사진 : 유튜브 공식 예고편 캡처


단종은 정말 스스로 목매었을까?


실록만 놓고 보면 의금부 도사 왕방연은 단종을 영월로 호송한 관원이 아니라 그 뒤에 사약을 올리러 간 인물이다. 사실 그의 시조에 흐르는 정서도 사약을 전하고 돌아가는 길에 애통한 심정으로 노래하는 것에 가깝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는 이런 말을 대놓고 할 수 없었다. 왕방연이 사약을 가져간 금부도사라면, 세조는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것도 모자라 어린 조카를 죽인 임금이 되기 때문이다. 조선의 공식 역사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노산군이 이를 듣고 스스로 목매어서 졸(卒)하니, 예(禮)로써 장사 지냈다.”(<세조실록> 1457년 10월 21일)


이렇게 스스로 목을 맸다는 것이 조선왕조가 밝힌 단종의 사인이다. 무엇을 듣고 그랬다는 말인가? 같은 날 실록 기사를 보면 금성대군 이유와 장인 송현수(정순왕후의 아버지)가 역모 혐의로 처형되고 화의군 이영, 한남군 이어, 영풍군 이전, 그리고 매형 정종(경혜공주의 남편)이 죽을 위기에 처했다. 모두 단종을 지키기 위해 애쓰던 측근들이다. 세종대왕의 자식들과 장인·매형이 자기 때문에 죽게 생긴 것이다.


정말 그래서 자살했을까? 2년 전 왕위를 찬탈할 때도(1455년 윤6월 11일) 세조와 공신들은 단종의 측근들을 몽땅 잡아들여 유배 보내는 수법으로 어린 임금을 압박한 끝에 선위를 이끌어냈다. 그러므로 측근들이 죽어 나간다는 소식을 들은 단종이 이번에는 스스로 목숨을 던져 구하려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당시 정황과 민간 기록, 그리고 영월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진실은 훨씬 잔혹하다. 먼저 세조는 분명히 단종에게 사약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그 사약에 관한 기록이 의금부에 남아있음을 훗날 성리학자 기대승이 임금과의 경연 자리에서 밝혔다.(<선조실록> 1569년 5월 21일) 단종이 죽음에 이른 경위도 민간 기록에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사약을 받들고 온 금부도사 왕방연이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나장(의금부 옥리)이 시각이 늦어진다고 발을 굴렀다. (중략) 이에 통인이 활줄에 긴 노끈을 잇고 (노산군이) 앉아있는 좌석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당겼다.”(이긍익, <연려실기술> 단종조 고사본말)


영월관풍헌.jpg 영월 관풍헌 전경. 단종이 최후를 맞은 장소다. / 사진 : 국가유산포털


활줄 풀어달라고 한 단종의 혼령


묘사가 마치 눈앞에서 본 것처럼 생생하다. 이런 기록들은 대체로 단종의 죽음을 애통하게 여긴 영월 사람들이 써서 간직하거나 구전과 민요로 전한 데서 유래하였다. 이른바 ‘단종애사(端宗哀史)’가 세간에 흘러나와 야사가 되고 민담이 된 것이다. 1660년 영월군수 윤순거는 노산군과 관련된 모든 자료를 수집해 <노릉지(魯陵志)>를 편찬했다. <노릉지>에서는 노산군이 죽은 시간과 경위까지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세조 3년(1457) 10월 24일 유시(酉時, 오후 5시~7시)에 공생(통인)이 활줄로 노산군의 목을 졸라 숨지게 하였다.”


단종은 사약을 거부하고 활줄에 목이 졸려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사약(賜藥)은 임금이 하사하는 독약이다. 죽을죄를 지었지만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 몸을 온전히 보존하고 스스로 죽을 수 있도록 배려한다는 의미다. 단종은 그런 파렴치한 은혜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약을 거부함으로써 죽음의 본질을 분명히 하고 숙부의 패륜을 드러내려 했을 것이다.


죄인이 사약을 거부한다고 해서 관원들이 네 알겠습니다, 하고 물러갈 순 없는 노릇이다. 임금의 은혜를 빙자했지만 사약 또한 죽이라는 것이다. 명을 받고 온 관원들에게는 죽음을 집행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노산군은 얼마 전까지 조선을 다스린 전직 임금이었다. 게다가 세종대왕의 적장손이자 문종의 적장자로 세조보다 고귀한 혈통을 지녔다. 강제로 명을 수행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랬다가 훗날 패가망신할 위험도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자 단종을 모시던 통인이 나섰다. 통인은 관아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구실아치로 공생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야사나 민담에는 그가 상을 바라고 자청했다고도 하고, 단종이 보다 못해 시켰다고도 한다. ‘차마 못 할 일’을 자발적으로 저질렀을 것 같지는 않다. 관원들이 집행할 수 없으니 통인을 내세웠을 가능성이 높다. 목을 졸라 죽이는 건 사약을 완강하게 거부하거나 약발이 잘 안 받을 때 쓰는 방법이다.


목을 조르는 도구로는 활줄이 쓰였다고 한다. 활줄(활시위)은 활대에 걸어서 켕기는 줄을 말한다. 화살을 걸어서 쏘는 줄이므로 팽팽한 상태로 힘껏 잡아당겨도 끊어지지 않아야 한다. 조선시대 활줄은 비단실이나 면실을 여러 겹으로 중첩하고 밀랍을 발라 만들었다. 목을 조르는 도구로 손색이 없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조선 후기의 야담집 <금계필담(錦溪筆談)> 등에 흥미로운 설화가 전한다. 단종이 죽고 난 뒤에 영월에는 새로 부임한 군수들이 연이어 죽어 나가는 변고가 생겼다고 한다. 그러다 문신 박충원(1507~1581)이 상관에게 미움을 받아 영월군수가 되었다. 그는 부임한 첫날 밤에 주위를 물리치고 방안에 홀로 앉아있었다. 한밤중에 홀연히 익선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은 임금이 들어와서 말했다.


“나는 공생에 의해 목매어 죽었는데 아직도 활줄이 감겨 있어 아픔을 참을 수 없구나.”


박충원은 단종의 혼령임을 알아차리고 뜰에 내려가 엎드렸다.


“신이 풀어드리고 싶지만 전하의 옥체가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그동안 부임한 사또들은 내 말도 듣기 전에 놀라서 죽었는데 그대는 용기와 충심이 가상하도다. 내가 묻혀있는 곳은 전에 호장으로 있던 엄흥도가 알고 있다.”


단종의 혼령은 이렇게 말하고 사라졌다. 다음 날 아침 신임 군수는 아전에게 엄흥도를 찾아오라고 명했다. 관아에 불려 온 엄흥도는 어린 임금의 시신을 자신이 거뒀다고 고했다.


“소인이 그날 전하의 옥체를 받들어 모셨지만 활줄은 미처 풀지 못했습니다.”


박충원은 엄흥도와 함께 단종이 묻힌 곳에 가서 관을 열게 하였다. 시신은 마치 살아있는 듯했는데 활줄이 여전히 목에 감겨있었다. 즉시 그것을 풀고 정성껏 제문을 지어 제사를 올렸다. 그날 밤 단종의 혼령이 다시 나타나 두 사람을 치하하고 보답을 약속했다. 박충원은 명종·선조 대에 육조 판서를 모두 거치고 양관 대제학을 지냈다. 실록에 설화의 원형으로 보이는 그의 졸기가 실려있다.(<선조수정실록> 1581년 2월 1일 ‘박충원의 졸기’)


3.jpg 영월 보덕사 산신각에 있는 단종 어진. 어린 임금이 죽어서 태백산 산신령이 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 사진 : 한국학중앙연구원


‘육지 속의 섬’ 청령포에 갇히다


단종의 죽음에 얽힌 진실이 세간에 퍼져나가자, 세조와 공신들이 저지른 역사 왜곡이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다. “노산군은 스스로 목매어서 죽었고, 조정에서는 예를 다해 장사 지냈다”라는 <세조실록>의 기술은 사실과 달랐다. 어린 임금은 숙부가 보낸 사약을 거부하다가 활줄에 목이 졸려 죽었고, 그의 시신은 방치되었다가 산 중턱에 초라하게 묻혔다. 의로운 선비들은 이와 같은 역사 날조에 분노했다.


“이것은 여우와 쥐 같은 무리의 간악하고 아첨하는 기록이다. 후일 실록을 편찬한 자들이 당시에 세조를 따르던 자들이니, 실록을 모두 믿을 수는 없다.”(이자, <음애일기>)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하고 영월로 유배 보낸 것도 실록에는 세조 3년(1457) 6월 21일 기사에 나오지만 사실은 1년 전의 일이었다. 1456년 6월 사육신 등의 옥사가 벌어지고 상왕 복위 모의를 단종도 알고 있었다는 증언이 나오자, ‘난을 피하여 거처한다’는 명목으로 청령포에 안치한 것이다.(<노릉지>, <해동야언> 등) 영월 민요 ‘대왕인산요’는 당시 단종의 귀양 행로를 노래하고 있다.


“때는 바로 병자년(1456)의 삼복더위 유월이라 / 이십이일 화양정서 환관 안로 전송 받고 / 광나루서 뱃길 타고 여주 이포 내리시어 / 원주 주천 거치시와 영월이라 청령포에 / 이십팔일 당도하니 뒷산은 육육봉이 / 칼날 같이 들어섰고 동남북 삼면에는 / 깊은 강물 굽이쳐서 반도를 이뤘으니 / 천혜되 고도로다 군졸 이십 경계하니 / 시종인들 있을손가 시녀 하나 있을손가”(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구비문학대계> 2-9, 강원도 영월군 편, 1986)


단종의 유배지 영월은 높은 산과 고개가 병풍처럼 두르고 있어 외부와 접촉하기가 쉽지 않은 고장이다. 그중에서도 청령포는 동쪽, 남쪽, 북쪽의 삼면이 서강(남한강 지류)으로 둘러싸였고 서쪽은 깎아지른 절벽이 가로막은 ‘육지 속의 섬’이다. 유배지 자체가 감옥이나 마찬가지였다. 외부와 단절된 곳에 단종을 가둬놓고 완전히 고립시킨 것이다.


당시 영월은 인구가 육칠백 명에 불과했다. 또 단종이 거처한 청령포에는 금표를 세워 외부인의 출입을 아예 막았을 것이다. 따라서 어린 임금이 영월 청령포에 격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세조 측에서 이곳을 택한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단종의 유배를 비밀에 부치려고 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민심을 기만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눈을 언제까지고 속일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흘러 단종이 서울에 없다는 게 드러나고, 영월 첩첩산중에 귀인이 있다는 소문이 나자 상왕의 유배가 알려지고 민심이 술렁거렸을 것이다.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문종 때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원호는 청령포 맞은편 절벽 위에 초옥을 짓고 어소(御所)를 바라보며 밤낮으로 눈물지었다.


4.jpg 청령포는 강과 절벽에 둘러싸인 육지 속의 섬이다. 단종은 외부와 단절된 채 이곳에서 울분과 상심을 달랬다. / 사진 : 영월군


의인 엄흥도와 노산군 복권 운동


1457년 여름 단종의 거처는 영월 관아의 관풍헌으로 옮겨졌다. 청령포에 홍수가 나서 동헌 객사에 머물게 한 것이다. 어쩌면 관아에 두고 철통같이 감시하려고 했을 수도 있다. 그해 6월 27일 단종의 숙부이자 세조의 동생인 금성대군이 유배지 순흥에서 난을 일으키려 한다는 고변이 궁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미 그때 노산군이 화근이므로 제거해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을 것이다. 관풍헌에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10월 24일 단종은 사약을 거부하고 활줄에 목이 졸려 생을 마감했다. 노산군의 시신은 청령포 강물에 던져 버린 것을 호장 엄흥도가 몰래 거둬 영월군 북쪽에 있는 동을지(冬乙旨)에 매장했다고 한다.(윤순거, <노릉지>) 호장(戶長)은 향리의 우두머리를 가리킨다. 고을의 실무 행정을 총괄하는 위치에 있었기에 관리들이 정치적 이유로 꺼리는 일도 결단하여 처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 건은 어지간한 담력으로는 엄두도 내지 못했으리라.


“호장 엄흥도가 통곡하면서 관을 갖추어 이튿날 아전과 백성들을 거느리고 군 북쪽 5리 되는 동을지에 장사 지냈다. 이때 흥도의 일족들은 화가 있을까 봐 두려워 앞다퉈 말렸다. 그러나 엄흥도는 ‘옳은 일을 하고 해를 당하는 것은 달게 생각하는 바’라며 위험을 무릅썼다.”(이긍익, <연려실기술> 단종조 고사본말)


영월 호장 엄흥도는 조선의 의인이었다. 의인은 옳은 일을 하고 해를 입는 것을 달게 생각한다. 성종 대 이후 조정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사림(士林)파도 옳은 일을 하려고 했다. 가련한 노산군을 기리고 불의를 행한 세조를 깎아내리다가 연산군 4년(1498)에 무오사화를 당하기도 했다. 중종반정 이후 노산군 복권 운동이 일어난 것은 필연이었다. 임금이 바뀔 때마다 노산군의 제사를 지내고 묘를 정비하는 일들이 논의되었다.


중종 11년(1516)에는 우승지 신상을 보내 노산군의 묘를 찾았는데 무덤의 높이가 겨우 두 자(약 60센티미터)에 불과했다고 한다. 비록 묘는 초라했지만 영월 백성들은 임금의 산소라 하여 때마다 제사를 드렸다. 이자는 <음애일기>에 “촌 동네의 부녀자와 아이들이 지금까지 분하게 여기니 충신·의사가 꼭 대갓집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소회를 남겼다.


현종 1년(1660)에 <노릉지>를 편찬한 영월군수 윤순거는 노산군의 묘를 ‘노릉(魯陵)’이라고 지칭했다. 능(陵)은 국왕과 왕비의 무덤이다. 노산군이 정당한 임금이고 언젠가는 복위할 것이라는 민심이 담겨 있다. 복위는 숙종 24년(1698) 10월 24일 왕이 대신들과 의논하고 비망기를 내리며 이뤄졌다. 묘호는 ‘단종(端宗)’, 능호는 ‘장릉(莊陵)’으로 정해졌다.


6.jpg 단종의 능인 영월 장릉. 조선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서울과 경기도를 벗어난 곳에 있다. / 사진 : 국가유산포털


생이별한 아내 그리며 돌탑을 쌓다


단종은 첩첩산중 영월에 철저히 고립되었지만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열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객사인 관풍헌에 머물 때 매번 매죽루(梅竹樓)에 올랐는데, 밤이면 사람을 시켜 피리를 불게 했으므로 그 소리가 멀리 있는 마을에까지 들렸다. 또한 적막한 누각에서 구슬프게 시를 읊으니 듣는 사람마다 눈물을 흘렸다.


“달 밝은 밤 두견새 우는데(月白夜蜀魄啾) / 시름 겨워 누각에 기대었네(含愁情倚樓頭) / 네 울음소리 슬퍼 나 듣기 괴롭구나(爾啼悲我聞苦) / 네 소리 없으면 내 시름 없을 것을(無爾聲無我愁)”(<열성어제> 권2 ‘단종대왕’)


단종의 노래 ‘자규사(子規詞)’의 앞부분이다. 두견은 소쩍새를 말하며 자규(子䂓)라고도 불렀다. 문학작품에서는 꽃가지에 피를 토하면서 우는 새로 표현되었다. 단종은 쫓겨난 임금의 애통한 심정을 피를 토하는 듯한 두견의 울음소리에 빗대 세상을 울렸다.


홀로 된 단종이 가장 보고 싶었던 사람은 생이별한 부인 정순왕후 송씨였다. 청령포에서 어린 임금은 아내가 그리울 때마다 다시 만나길 빌며 돌탑을 쌓았다. 그 애틋한 역사가 청령포의 망향탑에 깃들어 있다. 사랑하는 이에게 전하고 세상과 소통하고자 한 단종의 이야기는 영월 백성들의 구전과 민요에 실려 온 나라에 퍼져나갔다. 사후 241년 만에 단종의 복위를 이끌어낸 것은 오랜 세월 사람들의 마음이 모여 두텁게 쌓인 민심이었다.


“서울 생각 나실 적에 잔돌 하나 들고 올라 / 서울 향해 탑을 쌓고 한나절 무료할 땐 / 노송 양지 걸터앉아 울분 오열 하셨으며 / 쓸쓸한 석양에는 육육봉 높은 봉에 / 혈혈단신 오르시어 깊은 강물 굽어보며 / 시름에 잠기셨고 왕후 생각 간절하여 / 서울 향해 울으셨네”(영월 민요 ‘대왕인산요’ 중에서)


7.jpg 단종이 시를 읊었던 영월 자규루. 피를 토하는 듯이 우는 두견새의 울음소리에 빗대 쫓겨난 임금의 원통한 심정을 노래했다. / 사진 : 국가유산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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