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 또 다른 경로의 침범
내게도 이런 날이 올 줄이야
둘째 아이를 출산하고 3개월 만에 남편의 고향에서 탈출을 성공하게 되었다.
남편의 발령으로 이루어진 성과였다.
드디어 탈출이다........
하지만 그것이 더 큰 갈등의 시작이 될 줄 꿈에도 몰랐다.
시댁과의 물리적 거리가 생기고 나서야 그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 간섭과 생활의 침범을 받아 왔던 것인지 알게 되었다.
시부모님은 그동안의 잦은 왕래가 당연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셨다.
예전 같은 만남이 불가능해졌음에도 만남을 재촉하시기 시작하였다.
2시간이 넘는 거리였기에 자주 보기에는 무리였으나 가능하게 만드는 기적 같은 시댁이었다.
이사 한 첫해는 무려 1년에 13회를 만났고 31일을 같이 지냈다. 그다음 해는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우리가 방문하기도 하고 우리가 사는 곳으로 놀러 오기도 하며 최소 한 달에 2박 3일씩은 꾸준히 함께했다.
이렇게 5년을 보냈다.
우리 집에는 한 두 달에 한번 어김없이 2박 3일, 때로는 3박 4일 일정으로 오시는 '특급 VIP고객님', 바로 시댁 식구들이 계셨다.
그분들이 오시는 날이면, 우리 집은 작은 호텔이 되었다.
제시간에 차려지는 식사, 틈틈이 준비되는 간식, 아이들의 웃음소리까지 곁들인 프리미엄 휴식 서비스.
그리고 무엇보다 원하는 만큼 들어주고, 맞춰주는 무제한 경청 패키지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얘야, 물 어디 있니?"라고 한마디 하시면, 물이 담긴 컵이 조용히 그 옆에 놓였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당연하게 흐르는 완벽한 곳, 그곳이 우리 집이었다.
지난 몇 년간 수 없이 해 왔던 일이었지만 여기서도 계속될 줄은 몰랐다. 이곳에서는 남편도 나를 도와 함께 할 거라 믿었는데, 내 착각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정말 모르겠다.
그사이에 정말 많은 일들이 생겼고 그로 인해 남편과 싸움은 잦아졌다.
그렇게 우리 가정은 항상 폭풍전야 같았고 작은 일에도 부부싸움이 일어났다.
시어머니는 이사 후 연락을 자주 하셨고, 잦은 연락을 강요하시기도 하셨다.
그렇게 이것저것 본인의 일상과 조언해 주기를 즐겼다.
일 년이 되지 않은 어느 시점에 시어머니는 전화로 말씀하셨다.
“너희들 어른한테 할 도리를 해야 한다. 어른한테 올 때는 소고기 같은 걸 사 가지고 오는 거다.”
“나도 시댁에 갈 때 소고기 사 가지고 갔었다.” 말씀하셨다.
알겠다고 말씀드렸고, 그 이후로도 자주 전화하셔서 평소 마음에 안 들었던 점이나 불편했던 일들을 예전보다 강하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였다.
“너희 남편은 내게 용돈을 안 줘서 효도하는 것이 아니다.”
“네가 부모한테 잘하면 너희 애들이 너희들한테 효도할 것이다. ”
“다른 며느리들은 제사 전날 와서 음식 전부 해놓는다던데, 내가 너한테 그러라고 어디 시키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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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의 하고 싶은 말들을 원 없이 쏟아내셨다.
그 말들에는 억눌려온 세월의 그림자가 서려 있었다.
실제로, 시어머니는 시댁 식구들에게 충분한 대접을 받지 못한 맏며느리였다. 그 누구에게도 의지할 곳이 없었고, 존중받는 느낌을 경험하지 못했다.
시어머니는 부부 사이에서도 살가운 정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아오셨다.
그런 지난 세월 속에서 안정이나 따뜻한 애착 같은 감정은 뿌리내릴 틈이 없었을 것이다.
그 안에서 시어머니는 늘 고립되어 계셨다.
어쩌면 그래서였을까.
우리 가정을 향한 그 끊임없는 간섭, 며느리를 통제하고 아래에 두려는 태도는 단순한 권위나 고집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어머니가 오랜 세월 느껴온 외로움과 불안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언어였다.
누군가를 내려다보는 자리에서만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고, 그제야 스스로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쏟아내는 충고와 간섭은 여전히 내 일상을 흔들었고 그 상처를 껴안고 살아야 하는 건 결국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