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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월 Jun 28. 2020

<레이디 맥베스>

Bad girls go everywhere

*본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녀 안나는 비록 자신을 개처럼 다루는 주인일지라도 그 주인의 죽음을 막지 못하고 심지어는 방치한 데에 죄책감을 느껴 말을 잃는다. 캐서린과 밀애를 나누던 세바스찬 역시 캐서린과 함께 케빈을 죽인 것에 죄책감을 갖고 그 죄를 고백한다.

이들이 각자 입을 다물고 입을 여는 이유는 죄책감이다. 살인에 수반되는 죄의식 앞에 그들은 스스로 죄인이길 마다하지 않는다. 절절한 죄의 고백 앞에서도 차가운 얼굴을 하고서는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거짓말을 하는 캐서린은 이러한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인물들과 대치된다. 그리하여 캐서린은 '악녀'의 상징인 레이디 맥베스에 가장 부합하는 새로운 악녀인 양 느껴지기도 한다.

이동진 평론가가 영화당에서 말했듯 중요한 것은 누가, 무엇이 이 악녀를 만들어냈냐에 관한 문제이다. 인간이라면 보일 법한 혹은 가져야 마땅한 최소한의 동정심과 윤리의식, 이 모든 것이 결여된 캐서린의 악행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말이다.

출처:네이버 영화

생물(生物)로 인정받지 못하고 정물(靜物)로서 기능하는 존재

빅토리아 시대 여성들은 허리를 조이는 코르셋과 다리의 움직임을 최소화하는 크리놀린을 입고 집 안에서만 머무르길 강요받았다. 또한 여성이 다해야 할 의무는 후손을 낳는 것뿐이었다. 캐서린 역시 옷을 입기 전 매일 같이 하녀의 도움 아래에 코르셋을 조이고 소파에 가만히 앉아있거나 불편한 옷 탓에 어정쩡한 자세로 누워 시간을 보낸다.
이 영화에서는 안나가 캐서린을 꾸며주거나 씻겨주는 장면을 종종 보여주는데 대체로 안나는 캐서린의 고통에 무감각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를테면 안나가 캐서린의 머리를 빗겨주거나 씻겨줄 때가 그렇다. 안나의 거침없는 빗질에 캐서린은 외마디 비명을 뱉어내기 일쑤이고 캐서린의 피부가 빨갛게 일어나는데도 안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더 사정없이 박박 문지른다. 

흔히 하녀와 안주인의 관계는 완벽한 갑을 관계에 성립되기 마련인데 이 영화에서 보이는 캐서린과 안나의 관계는 주종 관계라고 보기 매우 어렵다. 을의 봉사는 분명한데 그 봉사의 대상, 즉 갑은 매우 모호하다. 직접적인 봉사의 대상은 캐서린이 확실한데 캐서린에게는 그 어떤 갑의 권위도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오히려 안나가 캐서린의 행위를 감시하고 저지하는 모습을 지속적으로 노출시키며 안나를 새로운 억압자로 내세운다.

당시 계급의 최하층인 하녀에게도 살아 있는 인간으로 여겨지지 못했던 캐서린은 남편과 시아버지에게도 그저 후손을 보기 위한 수단, 수음의 대상에 불과하다. 옷을 벗을 수도, 간단한 산책을 위해 집 밖을 나갈 수도 없이 캐서린은 그저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그렇게 박제된 것 마냥 존재한다. 


살인은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결정할 수 없는데 단지 숨을 쉬고 있다는 이유 하나로 살아있다 칭하기 참으로 민망하다.

출처:네이버 영화

자유에서 완벽하게 차단된 캐서린은 세바스찬을 통해서 이 땅에 자유가 아직 존재함을 발견한다. 고분고분하지 않고 반항적인 세바스찬의 됨됨이에 매료된 캐서린은 그와 밀애를 즐기게 되고 그와 함께일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노라 다짐한다.
그러나 정작 영화는 그들이 사랑을 속삭이는 장면에 있어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보다 황량한 분위기를 나타내고 그들이 사랑을 나눌 때에도 신음소리, 침대가 삐거덕거리는 소리 등을 이용해 오직 육체적 쾌락만이 그득한 장면을 연출해낸다. 서로를 바라보는 달콤한 시선 따위 부재한다. 그리고 마침내 극의 말미 캐서린은 오롯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 자신의 사랑인 세바스찬을 무참히 짓밟는다. 

세바스찬은 이 영화에서 여자 주인공의 연인으로서 기능한다기보다 캐서린이라는 인물의 저항을 그려내는 도구로서 기능한다. 당시 사회는 섹스를 금기시하고 모든 쾌락으로부터 여성을 단절시켰는데 이러한 폭압의 시대에 캐서린은 섹스를 통한 쾌락을 좇았다. 캐서린의 밀애는 당시의 폭압적인 시대를 정조준한 저격이며 가장 적극적인 반항이라 할 수 있다.


캐서린이 한 마지막 거짓말은 온전히 그녀 스스로를 위한 것이었으며 이는 즉 그녀가 진정으로 욕망하던 것은 세바스찬이 아닌 자기 자신의 삶이었음이 드러나는 중요한 대목이다.

출처:네이버 영화

이와 같은 맥락에서 영화의 결말을 두고 캐서린은 과연 세바스찬을 사랑했는가에 대한 논의 역시 완전하게 불필요하다 말할 수 있다. 오직 복종만이 존재하던 세계에서 유일하게 불복종을 선보이는 이었기에 그에게 흥미를 가졌을 뿐 캐서린이 사랑한 것은 세바스찬이 아닌 저항 그 자체였음이 분명하다. 때문에 그녀가 세바스찬을 갖기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고 해석하는 것 역시 완전히 그르다. 그녀가 갖고 싶었던 것은 한 남성도, 그 남성으로부터의 사랑도 아닌 감옥과도 같은 옷과 집으로부터의 해방이었을 뿐이다.

욕망의 대상은 인간도 사랑도 아닌 편한 옷을 입고 산책할 수 있는 권리, 종속으로부터의 자유, 존엄한 인간으로서의 권리.

도덕과 윤리는 사익만을 위해 질주하는 인간을 멈추게 하는, 그리하여 세계를 '안전'하게 유지하는 최적의 수단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안전'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누구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도덕과 윤리를 발판 삼고 있는지, 우리는 마땅히 숙고해보아야 한다.




서린은 총 세 번의 살인을 저지르고 각각의 살인마다 공범이 있었다. 살인의 공범인 안나와 세바스찬 역시 캐서린과 마찬가지로 주종 관계에 있어 종속된 인물들로서 그들 역시 살인을 직접 저지르거나 살인 장면을 방관하는 것을 통해 상승 의지를 드러낸다. 그러나 그들의 상승 의지는 자유의 문 턱 앞에서 매번 고꾸라지고야 만다.

예컨대 캐서린 시아버지를 죽이는 장면에서 캐서린은 안나에게 함께 테이블에 앉아 밥을 먹을 것을 권유하고 그의 가족에 대해 묻는다. 캐서린이 안나에게 인간성을 부여하는 중요한 순간이다. 그러나 정작 안나는 앉아서 밥을 먹을 기회와 자유로이 발화할 기회를 내팽개치고 주인의 죽음을 방관했다는 죄책감에 입을 다물고야 만다.

출처:네이버영화

안나에게 죽은 시아버지는 자신이 끝까지 안전하게 모셨어야 할 주인이었다. 그러한 주인의 죽음에 안나는 끊임없이 자책한다. 캐서린이 주종 관계를 깨부수는 동안 안나는 과거의 사고방식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종속된 자로 머무르기만 한다. 그 종속을 파괴할 의지도, 생각도 없다.

이렇듯 해방을 꿈꾸지 않는 안나를 캐서린은 더는 살피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죄를 안나에게 뒤집에 씌운다. 한때는 같이 억압받던 인물이자 같은 여성인 안나까지도 짓밟는 캐서린의 악독함에 누군가는 끊임없이 뒤바뀌는 권력구조를 이야기한다. 피억압자로서 존재하던 캐서린이 타인에게 새로이 억압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의미하는 바는 권력구조에서 우위를 점하게 된 새로운 억압자의 등장이라기보다 자유와 해방에 대한 의지가 없는 자에 대한 캐서린만의 처벌로 보는 편이 더 바람직하다. 자유를 꿈꾸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해방에 훼방 놓던 이까지 안고 가는 투쟁이란, 현실에서는 어불성설일 테니 말이다.

명백하게 이 영화의 주인공인 캐서린은 해방과 자유를 꿈꾸는 페미니스트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의 투쟁은 피로, 거짓으로 물들여있다.
그러나 캐서린의 자유를 향한 갈망과 발돋움을 단지 욕망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것이 무척이나 거북하게 여겨질 만큼 그녀의 모든 질주는 처절했고 간절했으며 모든 여성들이 행했어야 마땅할, 반드시 필요한 삶을 향한 사랑이었다.
부계를 말살하는 방식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캐서린을 해방시킬 수 없었다. 그녀의 방식이 설령 비윤리적이고 비인도적이다 할지라도 선뜻 비판할 수 없는 것은 나 역시 모든 인간의 완전한 해방을 꿈꾸기 때문이다.

연대는 마냥 선하지도, 달콤하지도 않다. 스윗함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세계 - 우리의 세상이다.


우리의 투쟁이 누군가에게는 공격으로 여겨지기에 비록 우리가 평화를 원했을지라도 이내 격한 싸움으로 번지기 십상이고 심지어는 같은 여성에게도 외면받기 십상이다. 또한 세상의 악이라 손가락질받기 십상이며 쏟아지는 비난 속에 스스로를 검열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때때로 선하지 못한 우리 자신의 언어에, 행위에 무너지기도 한다.


영화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악한 행동(삼대에 걸친 살인, 심지어는 죄 없는 아이까지 죽여 버린)을 통해 그 어떤 투쟁도 마냥 선할 수 없음을 피력한다. 그리고 조언한다. 우리의 연대도, 투쟁도 반드시 선할 필요는 없다고 말이다.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 그것을 정확히 반으로 가르는 기준 따위 전무하다.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선해야 한다' 역시 여성을, 인간을 옥죄는 코르셋은 아닐지 질문해야 한다.

투쟁의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모든 상처들에 나 역시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단지 인간이길 원한다고 외치는 우리 역시 이미,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저 나의 존엄을 지키는 일이 결국에는 모두의 존엄을 지키는 일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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