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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월 Nov 20. 2020

커피빈 아이스 바닐라 라떼와 시래기 된장국

무직자 딸을 둔 실직자 아빠의 뚝딱 요리


갑작스러운 실직을 맞아 본격적으로 요리를 시작한 아빠의 레시피와 아직도 무직인 딸의 소담한 일상을 같이 씁니다. 우리 부녀는 (비록 직업은 없지만) 여전히 잘, 살고 있습니다. 


Ep. 2

언제부터인가 커피 없이는 못 사는 사람이 되었다.



*

대부분의 사람이 으레 그렇듯 내 인생 최초의 커피는 맥심 모카골드였다.

물 온도가 그대로 전해지는 얇은 종이컵 안, 찰랑거리는 진한 황토색의 물은 초콜릿보다는 덜 달았지만 덜 달았기 때문에 뒷맛은 더 좋았다.

어린 시절, 커피와 술맛을 알게 되면 진짜 어른이 된 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부터 나는 커피와 술을 즐기는 진짜 어른의 삶을 동경했다.


스무 살 무렵, 나는 수업에 지각을 하더라도 커피 한 잔 테이크 아웃하는 간지는 버릴 수 없었다.

더운 날이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추운 날이면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들고 교정을 누볐고 어른의 삶에 심취했다.

그때는 밤을 새우기 위해서 커피를 마시는 게 싫지 않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샷 하나 추가요."라는 주문은 나를 꽤 그럴싸한 현대인으로 만드는 마법주문 같았다.

어딘가 무척 바빠 보이는, 근데 그것도 그냥 바쁜 게 아니라 뭔가를 성취하느라 몹시 바쁜 그런 사람 말이다.

해야 할 일이 반드시 있는 삶, 그리고 그 해야 할 일을 내가 스스로 선택하는 삶.

말하자면 커피는 사람을 어른으로, 제대로 기능하는 사회인으로 만드는 마법인 셈이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바쁜 것에 질렸다.

바쁜 건 더 이상 멋지지 않았다.

바쁜 건 그냥 힘든 거였다.


"커피 한 잔의 여유"라는 유명한 광고 문구가 가리키는 진짜 현실은 커피 한 잔 마실 때를 빼고는(그마저도 음미보다는 호록에 가까운) 온종일 정신없는 삶이었다.

세상엔 제대로 기능하지 않으면 탈락되기 때문에 빠르게 기능하기 위해 커피를 마셔야만 하는 삶도 있었다.


커피는 낭만이기보다 생존이었고 쉼보다는 뜀이었다.

마시면 심장이 쿵쿵 뛰었고 없던 에너지가 돌았다.

그건 그저 기계가 잘 돌아가게끔 돕는 윤활유 정도가 아니었다.  

"이제 그만 좀 쉽시다, 나 파업!"하고 스스로 작동을 멈춘 기계 위로 매섭게 쏟아지는 3톤짜리 검은 석유였다.  



그러나

멋진 어른을 상징하던 커피의 세계가 산산이 조각난 후에도 나는 여전히 커피를 마신다.

커피로 얻게 된 만성 속 쓰림으로 인해 커피를 줄이는 중이기는 하나

밥을 먹은 후에는 어김없이 블랙커피를 마시고 사람들과 만날 때면 시간을 보내기 위해 카페에 가고 커피를 마신다.

자는 시간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영 게으르게만 느껴져서 또 마신다.

"커피를 마셔야만 하는 상황은 부당해!"라며 격분하면서도 달아오른 열에 갈증이 나 또 마신다.

진정한 카페인 중독자는 카페인을 비난하면서 동시에 카페인에 의존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오늘은-

딸과의 약속을 지키고자 매 끼니 요리할 음식을 궁리하는 아빠를 위해 마셨다. (핑계 같지만 진짜다.)

요리를 하다가 돌연 멈추고서는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는 아빠의 모습을 상상할 때면 나 역시 즐거워진다.

아빠는 결코 굶지 않는다.

그는 단 하나를 만들더라도 정성을 들인다.

밥시간이 지나면 내 핸드폰엔 아빠의 레시피가 담긴 메시지가 도착한다.

부지런한 그를 볼 때, 나는 늘어졌던 몸을 일으킨다.

늦게나마 그의 레시피를 읽고, 글을 쓴다.



추신: 커피빈의 아이스 바닐라 라떼에는 샷이 하나만 들어간다고 한다.

어쩐지 잠이 안 깬다 했다.








시래기 된장국 레시피



필요한 재료: 시래기, 청양고추 2개, 된장 3 큰술, 간 마늘 반 큰술, 국물 새우 2큰술, 멸치 육수



1)

멸치 육수를 낸다. 시중에서 간편히 구할 수 있는 다시팩을 사용해도 좋다.


(왜 다른 단계의 사진들은 다 있는데 멸치 육수 낸 사진은 없는지 모르겠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아빠의 마음.)


2)

시래기를 송송 썬다.


3)

만들어 놓은 멸치 육수에 된장 3 큰술을 넣어준다. 이때 된장은 체에 걸러준다.



4)

간 마늘 반 큰술 넣고 끓인다.


(아무래도 반 큰술보다는 더 많아 보이는데 일단 아빠는 반 큰술이라고 한다. 사진과 설명 중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5)

시래기와 국물 새우(국물 새우가 따로 있냐고 물으니 작은 새우라고 한다. 먹기에는 너무 작고 국물 내기에 적당해서 그런가?) 두 큰술 넣는다.


(저 세상 초점. 아빠는 과연 시래기와 국물 새우 중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던 걸까? 아빠 앞에선 4800만 화소도 무용지물이다.)


6)

청양고추 2개를 썰어 국에 넣고 한소끔 끓인다.


(썰린 고추 사진도 아닌, 이전 사진들처럼 숟가락 위에 재료를 올린 것도 아닌, 그냥 저렇게 도마 위에 덜렁 누워있는 생 고추 사진이라니... 그 와중에 또 사진은 정갈한 게 포인트다. 아빠는 정말 감각이 있다.)


7)

시래기 된장국 완성!


(저 세상 초점에 이은 저 세상 클로즈업. 난 이 사진을 보자마자 이 사진은 결코 아빠의 작품일리 없다 생각했다. 그렇다면 범인은 단 한 명, 조여사. 레시피를 받고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시래기 된장국 완성샷은 누가 찍은 거냐고 물었더니 아빠는 허허 웃으며 엄마를 지목했다. 역시, 아빠가 찍은 게 아니었다. 엄마는 "왜! 내가 찍은 게 뭐가 어때서!"라며 물었지만 아빠와 나는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촬영도 다 감각이 있어야 하는 것을... 우리는 엄마가 사진을 잘 못 찍는다는 사실에 대해 오래도록 함구해왔다. 친구는 이 사진을 보고서는 "아버지가 사진을 정말 잘 찍으시는 거고, 어머니는 시각이 참 새로우시네!"라며 사진에 대해 최대한 긍정적으로 말해주었다. 그렇다, 엄마는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사진을 찍는다.)


아빠가 찍은 시래기 된장국 완성샷은 아래와 같다.

(알고 보니 엄마는 시래기 된장국이 담긴 용기가 마음에 안 들었다고 한다. 그럼 다른 데에 옮겨 담으면 되지... 아무래도 엄마는 정말 저 세상 클로즈업 샷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번외: 시래기 된장 메밀 칼국수

끓인 된장국에 씻은 메밀 생면을 넣고

잠깐(잠깐은 도대체 몇 분일까?) 끓인다.


이때 메밀 생면은 꼭 씻어서 사용해야 한다. 메밀 생면에는 원래 밀가루가 묻어 있는데 이게 국물에 들어가면 국물을 걸쭉하게 만든다고 한다.



*

레시피에 대한 이야기가 끝난 후 전화를 끊으려던 내게 아빠는 다급히 "그 마지막 사진은 시래기 된장국 메밀 칼국수다잉~!"라며 칼국수에 대해서도 꼭 쓸 것을 당부했다. 앞에서 이미 다 말했었는데 불성실한 딸내미가 행여 이 걸작을 잊을까 염려가 된 모양이었다. 자신의 요리에는 언제나 자부심을 느끼는 아빠이지만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발상이 더해진 요리에는 더 큰 애착을 보이곤 한다. 나는 요리에 진심인 아빠가 귀엽고 또 멋지다. 무뚝뚝한 아빠는 평소에도 말을 툭툭, 다소 무심하게 하는 편인데 요리에 대해 설명할 때면 사람이 달라진다. "그 마지막 사진은 시래기 된장국 메밀 칼국수 다잉~!"라며 다급한 말투로 강조하던 그의 음성을 아마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



레시피 / 사진 출처: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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