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직자 딸을 둔 실직자 아빠의 뚝딱 요리
갑작스러운 실직을 맞아 본격적으로 요리를 시작한 아빠의 레시피와 아직도 무직인 딸의 소담한 일상을 같이 씁니다. 우리 부녀는 (비록 직업은 없지만) 여전히 잘, 살고 있습니다.
생일도 아닌데 케이크보다도 훨씬 더 비싸고 예쁜 파이를 먹었다.
동거인의 선물이었다.
*
"돈워리비달리"
달리 파이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건 친구 M을 통해서였다. 깔끔하게 단장한 카페에 가서 달콤하고 맛있는 디저트를 먹는 것이 취미였던 M은 당시 내가 좋아하던 영화를 콘셉트로 파이를 제작하는 곳이 있다며 정보를 물어다 주었고 그게 달리파이였다.
누구에게든 마음이 담긴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 그 계절감, 그때에 좋았던 말 한마디, 눈도 입도 달콤하게 담아내는 것, 그게 달리파이가 하는 일입니다.
디저트 그 이상의 추억과 가치가 되리라 믿습니다.
-달리파이 소개글 中
달콤했던 순간을 포착해 달콤한 디저트로 빚는다는 달리파이만의 신념은 꽤나 매력적이었지만 나는 번번이 귀찮다며 주문을 미뤘다. 파이를 주문하기 전, 파이 위에 새길 문구를 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뭐 대단한 문구 적는다고 그러냐 할 수 있겠지만은, 또 명색이 글쟁이가 꿈인지라 허투루 할 수가 없었다. 파이가 달콤한 추억의 형상이라면 그 위의 문구는 추억의 면면을 압축한 기호여야만 했다.
*
이런저런 이유로 몇 번의 주문 기회를 망치고 달리파이를 잊어가던 차, 며칠 전 동거인은 "이거 주문해볼까?"라고 말하며 내게 한 그림을 보여줬고 그건 달리파이였다. 이번 달은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콘셉트로 한다는 설명을 보자 주춤했던 마음이 다시 열의로 가득했다.
(동거인과 나는 이 영화를 정말, 사랑한다.)
동거인은 나와는 달리 추진력이 있는 사람이다. 내가 내 특유의 게으름으로 빈둥거리거나 주춤할 때마다 그는 앞장서 걷거나 뒤에서 내 등을 밀어준다. 주문을 결정하고 우리는 레터링 내용을 고심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영화 대사 중에 고르는 게 낫겠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인 그와 나는 영화 대사를 구글링하기 시작했고 몇 가지 후보를 추렸다.
"Mourir?" (Dying?)
"Courir." (Running.)
"Don't regret. Remember."
"You dreamt of me?"
"No. I thought of you."
우리가 선택한 최종안은
We're here.
It takes two to be funny.
영화의 대사인 "You are here. It takes two to be funny."를 약간 변형한 것이었다.
(비록 이 대사는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대화 내용 중에 있던 것은 아니긴 했지만 아무렴, 좋으니 그만이다)
*
사는 것이 참 만만치 않은 요즘이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전염병이 창궐하고 덕분에 취준생이든 자영업자든 힘들지 않은 사람이 없다. 건강한 생존을 위해 각자의 골방에 박혀 그저 이 비상사태가 무사히 지나가기 만을 바라는 요즘, 우리는 특히나 생존과 자유에 대해 깊이 골몰할 수밖에 없다. 보장된 안전과 자유에서부터 비롯되는 기쁨, 그것들에 대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피어나는 소란스러운 웃음이 있다는 것을 잃은 뒤에야 깨닫는다.
하지만 우습게도, 코로나 때문에 알게 된 즐거움이 있다면 그건 바로 둘의 즐거움이다. 나는 요즘 함께 살고 있고, 둘이어서 기쁜 날들을 보내는 중이다. 혼자였다면 곱절로 막막했을 날들을 즐거움으로 채우는 중이다. 각별한 날에만 특별히 주문할 법한 예쁜 파이를 아무 날도 아닌 보통의 날에 먹고, 보통의 날에 달콤함과 기쁨을 더한다. 보통의 날은 이렇게 가장 따뜻하고 달콤한 추억이 된다.
We're here, 나와 그는 - 우리는 이 방에 (무사히) 있고 (여전히) 잘 살아 있다.
언젠가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라는 책을 읽고 난 뒤 적어 놓았던 단평.
"혼자는 근사하고 둘은 즐겁다."
모두 각자가 있는 곳에서 근사하거나, 또는 즐겁길.
*
무엇이든 허투루 하지 않는 아빠의 오늘 요리는 명란 볶음밥. 곧 이사를 앞두고 있어 냉장고에서 죽어 가던 재료들을 소진하느라 바쁜 아빠다.
필요한 재료:당근 1개, 청양고추 2개, 스팸 반 통, 명란 2개, 계란 1개
1)
당근 1개를 먹기 좋은 크기로 썬다.
2)
청양고추 2개를 잘게 썬다.
3)
스팸도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준다.
(이 접시 하나로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빠의 깔끔한 성격, 수려한 칼 솜씨 등. 재료 준비를 이렇게 예쁘게 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사진 찍어야 해서 이렇게 정리한 게 아니라 진짜로, 원래 이렇게 한다. 나도 놀랍다.)
4)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른 뒤 썰어둔 당근과 청양고추를 넣고 볶는다. 당근이 얼추 익었다 싶었을 때(오롯이 개인의 감각에 의존해야 한다.) 스팸을 마저 넣고 볶는다.
5)
프라이팬에서 당근과 고추, 스팸이 익고 있을 때 재빨리 명란 2개를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준다.
6)
불을 끄고 프라이팬에 찬밥을 투하한다. 잘 섞어준다.
(이때는 섞느라 바쁘셨는지 사진이 없다. 지금껏 몇 개의 레시피를 받아본 결과 아빠는 굉장히 의외의 단계에서 사진을 빼먹는다. 내 기준에서는 꽤나 중요한 단계인데 아빠한테는 그게 아닌 걸까? 아무튼 아빠의 요리 시간은 정말 예측불허이다. 단계마다 세세히 사진 좀 잘 찍어달라고 요청할 수는 있으나 생략된 단계를 상상하는 재미가 있으니 그러지 않겠다. 그리고 아빠한테 뭘 더 요구했다가는 아예 레시피 자체를 못 받아 볼 수도 있다. 호달달...)
7)
다시 불을 켜고 재료들을 잘 볶다가 썰어둔 명란을 넣고 다시 볶는다. 그리고 요리가 거의 완성됐다 싶을 때쯤, 계란을 넣고 마저 볶는다.
8)
요리 완성!
(나는 볶음밥을 하면 그냥 프라이팬 채로 먹는다. 오랜 자취 생활의 경험으로 보건대 요리는 요리만 힘든 게 아니다. 그 뒤에는 어마어마한 복병 설거지가 있다. 그러나 아빠는 그런 것에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다. 그는 일단 요리를 하면 접시에 예쁘게 담아서 제대로 챙겨 먹는다. 봉긋하게 담긴 저 볶음밥은 분명 프라이팬에서 작은 밥공기로, 그리고 다시 접시 위로 옮겨진 게 분명하다. 스팸은 또 언제 구운 건지, 내게 준 레시피에는 설명이 나와있지 않다. 밥 다 볶고 남은 기름에 구웠으려나? 밥만 담고 보니 어딘가 허전해 보여서 또 뚝딱뚝딱 구운 것이 틀림없다. 아빠는 정말 부지런하고 성실한 요리사다.)
+레시피 / 사진 출처는 모두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