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직자 딸을 둔 실직자 아빠의 뚝딱 요리
갑작스러운 실직을 맞아 본격적으로 요리를 시작한 아빠의 레시피와 아직도 무직인 딸의 소담한 일상을 같이 씁니다. 우리 부녀는 (비록 직업은 없지만) 여전히 잘, 살고 있습니다.
아이유는 기분이 안 좋을 때면 우울한 기분을 떨치기 위해 먼저 몸을 움직이고, 또 이렇게 생각한다고 한다.
이 기분 절대 영원하지 않고 5분 안에 내가 바꿀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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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잠시 변형해본다.
아침에 좋았다가 점심에 나빠지고 또 저녁에 좋아지는 것은?
정답은 기분이다.
마음과 감정이란 게 어찌나 변덕스러운지 하루에도 기분은 좋았다가, 안 좋았다가, 최악이었다가, 또 최악은 면했다가 뒤죽박죽이다. 기분이 뒤바뀌는 순간마다 특별한 계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기분은 누가 혹은 뭔가가 부러 망치지 않아도 혼자 알아서 망가지기도 한다. 파괴력이 엄청난 친구이다.
(이미 수많은 사람의 공감을 산 진부한 얘기지만) 인생에도 리셋 버튼이 있었으면 좋겠다. 다시 살면 조금 더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소망이다. 그렇다면 다시 살면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일단 문과에 가지 않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문학을 전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해마다 공모전과 대기업 주최의 대외활동에 참여할 것이고 졸업 전에는 인턴을 할 것이다. 막학기에는 학업과 취준을 병행하며 칼졸, 칼취의 꿈을 이룰 것이다.
무직자로 살아보니 기분이 안 좋은 날에는 그게 다 내가 백수인 탓 같고 그렇다. 모든 우울이 나의 무직 상태로부터 오는 것만 같달까. 그럴 때면 자꾸 후회하게 된다. 아, 수학 좀 열심히 할 걸.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이렇다. 나는 여전히 내가 문학을 전공한 것에 후회가 없고 다시 살아도 이보다 나으리라는 확신이 없다. 내가 분노하는 대상은 낭만에 심취해있던 과거의 내가 아닌, 일탈과 방황을 용납하지 않는 무관용의 사회이다. "신입사원 모집해요!"라는 제목 아래에 작게 "경력자 우대"를 적어 놓는 뻔뻔한 현대 사회 말이다.
취업 준비생을 모아놓고 취준생의 우울에 대해 말하라 하면 아마도 이 우주에서 가장 긴 돌림노래가 탄생할 것이다. 굳이 들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 하나, 음악은 분명 단조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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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단조의 음악만이 가득 울려 퍼지는 나의 작은 우주에 균열을 내준 것은 동거인의 노랫소리였다.
마음이 울적하고 답답할 땐
산으로 올라가 소릴 한 번 질러봐
90년대의 추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이 뒷 가사. 나는 여전히 우울한 표정으로, 여전히 힘없는 목소리로 뭔가에 홀린 듯 노래를 이어 불렀다.
나처럼 이렇게 가슴을 펴고
쿵따리 샤바라 빠빠빠빠
기분은 파괴력만큼이나 회복력도 좋다. 때로는 어떤 노래 한 줄로도 나아지는 것이 기분이다. 리셋이 불가능한 불가피한 삶 속에서도 신의 축복을 찾아볼 수 있다면 바로 이런 지점이 아닐까. 어딘가 말썽인 웹페이지에 F5를 누르는 것만큼이나 간단한 기분 새로고침의 주문 "쿵따리 샤바라". 말하자면 전부 우스운 얘기지만, 가끔은 우스움이 삶의 속성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고작 "쿵따리 샤바라" 같은 주문에도 새로고침 될 수 있는 우스운 인생이라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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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빠의 요리는 “크래미 카레”. 아빠가 보내준 사진을 보자 기분이 좀 나아졌다. 카레의 색감이 따뜻해서 그런가?
필요한 재료: 양파 1개, 크리미 6개, 새송이 4개, 카레 가루 4큰술, 우유 500ml
1)
프라이팬에 식용유 두 큰술 둘러준 후 달궈질 때까지 기다린다.
프라이팬이 충분히 달궈지면 썰어둔 양파 1개를 넣고 볶는다.
2)
새송이 버섯을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준다.
3)
양파가 노릇해졌을 때쯤, 썰어놓은 새송이버섯을 넣고 같이 볶아준다.
4)
크래미 6개를 얇게 찢어준다.
5)
양파와 새송이버섯이 잘 볶아졌을 때쯤 찢어놓은 크래미 투하.
우유 500ml를 추가한 후 카레 가루 4큰술을 부어준다.
끓인다.
(엄마와 나는 정말 다르다. 나는 우유를 절대 먹지 않고 엄마는 우유를 무척 좋아한다. 계란찜을 할 때에도 엄마는 부드러운 식감을 위해 우유를 넣는 것을 선호했지만 우유라면 먹던 숟가락도 내려놓는 나 때문에 우리 집은 항상 우유 없는 계란찜을 먹곤 했다. 그리고 반(反)우유파였던 내가 독립한 뒤 비로소 우리 집은 우유 자유를 획득한 듯싶다. 카레에도 우유를 넣어 먹다니... 놀랍다 놀라워)
6)
밥 위에 완성한 카레를 부어주면 끝!
(일전에 아빠가 내 자취방에 놀러 왔을 때 아빠와 함께 장을 보러 간 적이 있다. 그날 아빠는 이것저것 골라 담으며 잘 해 먹고 살아야 한다고 거듭 당부했는데 그때도 장바구니에는 크래미가 들어 있었다. 혼자 집에 돌아온 후 냉장고를 정리하며 나는 대체 크래미는 어떻게 밥반찬이 될 수 있나 궁리했다. 양파와 대파, 햄, 참치는 대략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 감이 잡히는데 크래미는 도통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간식으로 먹었다. 김밥 싸려고 준비해둔 맛살 주워 먹듯이. 아빠는 크래미를 이렇게 써먹는구나, 카레에도 크래미를 써먹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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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카레에 야채가 좀 부족한 느낌이다. 건강을 위해 감자와 당근, 브로콜리 등을 추가하는 것이 어떨까?
모두 건강하고 즐겁게 삽시다. 쿵따리 샤바라!
+레시피/사진 출처는 모두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