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직자 딸을 둔 실직자 아빠의 뚝딱 요리
갑작스러운 실직을 맞아 본격적으로 요리를 시작한 아빠의 레시피와 아직도 무직인 딸의 소담한 일상을 같이 씁니다. 우리 부녀는 (비록 직업은 없지만) 여전히 잘, 살고 있습니다.
이제껏 뭘 했나, 하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면 흘러간 시간이 그저 덧없게 느껴지곤 한다. 덧없는 시간이 쌓여 보잘것없는 인생을 만든 것 같아 자책감에 시달린다. 제대로 된 인생을 살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시간이었노라, 주어진 시간은 너무 희박했노라 생각한다.
'시간'을 생각할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에도 이와 비슷한 감상에 시달리는 이가 있다. 시간을 훔치는 회색 신사에게 가장 먼저 현혹당하는 인물, 푸지 씨다.
제대로 된 인생을 살려면 시간이 있어야 하거든. 자유로워야 하는 거야.
푸지 씨의 말처럼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사실 이건 말이 되면서 또 말이 안 되는 문장이다. 왜냐면 사실 시간은 언제나 있기 때문이다. 다소 잔인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시간은 늘 있다. 엄밀히 말해 시간은 늘 흐르고 있다. 오직 한 방향으로만 고집스레 흐른다. 진짜 우리에게 없는 건 시간이 아닌 여유다.
우리는 흔히 '시간이 없다'라는 말과 '여유가 없다'라는 말을 혼동하여 쓴다. 하지만 시간과 여유는 엄연히 다르다. 예컨대 시간은 항상 있는 존재이고 여유는 보통은 없는 존재라는 것이 그렇다. 만회의 여지를 주지 않고 앞으로 흐름으로써 존재하는 시간과 달리 여유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도 가져보지 못한 것, 우리에게 없는 것이다.
'여유가 없다'라는 말과 '시간이 없다'라는 말을 겹쳐 사용하는 건 우리에겐 진짜로,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시간'은 관념으로써의 시간이 아닌 실제로 우리가 쓸 수 있는 시간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푸지 씨가 말했던 '자유'가 있는 시간. 그의 말처럼 제대로 된 인생을 살려면 자유로운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을 어떻게 채울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 해야만 하는 일을 하는 시간이 아닌 하고 싶은 일을 탐색하고, 행하는 자유의 시간. 푸지 씨의 말에 따르면 자유 행위의 연쇄 발생만이 제대로 된 삶을 낳는다.
비교와 경쟁, 세속적 가치의 주류화, 가시적 성취에 대한 집착. 조급한 마음의 출처는 이렇게나 다양하다. 우리를 바쁘게 하는 이유는 수없이 많고 바빠야 하는 이유를 찾을 만한 시간은 지극히 희박하다. 무언가를 이루는 것만이 일생의 과업인 양 여겨지는 지금 여기에서는 고민조차도 낭비에 불과하니.
사람들의 시간을 훔쳐 연명하던 회색 신사는 지금, 이곳에도 버젓이 존재한다. 점점 더 많은 불안과 초조를 퍼뜨리며 우리의 가장 가까운 곳에 일렁인다. 소설 속 도시 전체를 잿빛으로 물들였던 것처럼 지금 우리의 도시를 온통 회색빛으로 뒤덮는다. 아이들은 점점 더 외로워지고, 어른은 점점 더 많이 실패한다. 우리의 실패는 시간과의 경쟁으로부터 비롯된다. 제 아무리 열심히 뛰어봤자 결국에 쫓을 수 있는 건 시간의 뒤꽁무니밖에 없다. 우리는 결코 시간의 앞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고 시간의 손도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시간은 우리가 앞다투어 달려야 할 경쟁 상대가 아니다.
새해가 왔다고 사람이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새로운 계획을 세우기엔 또 새해만 한 이벤트가 없다. 그리하여 기록해보는 새해 다짐-
'시간을 낭비한다'는 생각으로 낭비하는 시간의 양을 줄여보고자 한다. 오늘은 뭘 했는지, 어둑해진 밤마다 성과를 세는 버릇으로부터 도망치고자 한다. 보이지 않는 시간을 보이는 것으로 채우려는 시도는 사람을 지치게 한다. 지치면 제대로 살 수 없다. 삶은 권태에 빠진 얼굴이 아닌 기쁨과 슬픔, 오만 감정을 두루 체험하는 살아 있는 얼굴로 꾸려야 한다. 시간 도둑이 모두 사라진 세상에 다시 살게 된 사람들이 되찾은 것은 저만의 시간, 즉 자유였다. 시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다음에야 맛볼 수 있는 자유. 세계를 체험하며 살기 위해서는 자유로워야 한다.
필요한 재료: 멸치 30개, 청양고추 3개, 김 1 봉, 들기름, 간장, 버터
1.
멸치 30개를 잘게 썬다.
(멸치가 이렇게 많이 들어간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아빠가 나에게 이 레시피를 주기 위해서 멸치 30개를 하나하나 다 세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정인가, 미련인가...)
2.
프라이팬에 버터 투하. 버터가 다 녹았을 때쯤, 잘게 썬 멸치와 간장 1/3 큰술을 넣고 함께 볶는다.
(사진 없음. 불을 올리기 시작하면 매우 바빠진다.)
3.
밥 한 공기에 들기름 한 큰 술을 넣어 섞는다.
4.
청양고추 3개를 잘게 썬다. 크게 썰면 주먹밥 먹다 눈물 콧물 쏙 빼는 수가 있으니 작게 작게 썰어준다.
5.
간장과 버터를 넣고 볶은 멸치에 김을 잘게 찢어 넣는다.
6.
들기름을 넣은 밥과 3번 단계에서 썰어 놓은 청양고추, 4번 단계에서 만들어 놓은 김 멸치 볶음을 잘 섞어준다. 그리고 꼭꼭 뭉쳐 주먹밥을 만든다.
난 보통 아빠가 한 음식은 다 맛있게 먹지만 이건 특히나 더 맛있었다. 매운 것을 잘 못 먹는 맵찔이 주제에 또 매운 것을 무척 좋아하는데 그런 나의 취향저격이었달까. 짭짤하면서 또 씹을수록 맵게 톡 쏘는 게 스트레스 해소에도 무척 좋을 듯하다. 역시, 인생은 매운맛이다. 눈물 콧물 쏙 빼며, 어쨌든 해피 뉴 이어!
+레시피/사진 출처는 모두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