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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월 Jan 12. 2021

눈이 오면 생각나는 마음 냉동고와 김치오이볶음밥

무직자 딸을 둔 실직자 아빠의 뚝딱 요리

갑작스러운 실직을 맞아 본격적으로 요리를 시작한 아빠의 레시피와 아직도 무직인 딸의 소담한 일상을 같이 씁니다. 우리 부녀는 (비록 직업은 없지만) 여전히 잘, 살고 있습니다



Ep.7


냉장고 입구는 노란색 립스틱을 바른 커다란 입 같다. 그 입속에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보관되어 있다. 시간이 지나도 썩지 않는 것들이다. 그래서 늘 생생하게 팔딱대는 것들이다. 잊혀지지 않는 줄거리다.
장은진 <울어본다> p.41


마음에도 냉동실이 있다. 일단 냉동실에 들어간 기억들은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도 부패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사는 동안 내내 마음 한 구석에 보관된다. 기어코 어느 날 떠올라 울음을 터뜨리게 만든다. 장은진의 소설 <울어본다>에 등장하는 여자 역시 마찬가지다. 여자의 마음 냉동고에는 여자를 아프게 하는 수많은 기억들이 보관되어 있다. 기억들은 종종 스스로 냉동실 문을 열고 걸어 나와 여자의 턱 밑 자리를 차지한다. 그런 밤이면 여자는 자주 “부엌으로 나가 냉장고 문을 열고 안으로 고개를 살며시 집어넣는다”(p.41). 냉장고는 울고, 밤은 냉장고 우는 소리로 가득해진다. 여자는 그 소리를 들을 때면 더욱더 울고 싶어지고, 울지 않기 위해 더, 더, 더 애쓴다.


어떤 날의 “울음은 패배”(p.64)처럼 느껴진다. 해서 여자는 ‘오늘만큼은 지고 싶지 않아’라는 마음으로 우악스레 울음을 참아보지만 모두 소용없는 일이다. 어떤 밤은 오직 지독한 허기와 외(괴)로움 만을 남기고 떠나기 때문이다. 그런 밤이면 모두가 질 수밖에 없다.


여자의 밤은 고독하고 고통스럽다. 누구도 여자의 곁에 머물지 않는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여자의 주위는 더욱더 고요해지고 밤의 고요를 깨는 건 고작 냉장고뿐이다. 매일 점점 더 큰 울음소리를 내며 적막을 깨는 냉장고. 요컨대 냉장고는 여자의 곁에 머무는 유일의 존재이자 여자를 대신하여 울어주는, 끝내는 여자의 눈물받이가 되어주는 울음 동반자이다.  




오늘 서울에는 눈이 왔고 나는 어김없이 눈에 관한 두 가지 이야기를 떠올렸다. 눈사람이 녹는 것이 못내 아쉬워 집 안 냉동고에 눈사람을 보관하는 사람의 이야기와 냉동고 안에서 우는 여자의 이야기. 같은 냉동고이지만 각자가 보관하는 대상은 사뭇 다르다. 전자는 낭만을 보관하고 후자는 슬픔을 보관한다. 모두의 냉동고에 눈물로 만들어진 ‘소금 사탕’(p.74)이 아닌 귀여운 눈사람이 있기만 하면 좋으련만 삶은 영, 녹록지 않다. 누군가의 냉동고는 아주 작은 눈사람 하나 놓을 자리 없이 소금 사탕으로만 꽉 차 있을지 모른다.


삶에도 균등한 배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소금 사탕이 놓일 공간과, 하얗고 단단한 눈사람이 몸을 얼릴 만한 공간이 적절한 비율로 나눠져 있어야 한다고. 냉장고에서 발생하는 소음이 울음소리인 것처럼 들리는 삶의 슬픔은 아주 가끔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추운 날이면, 냉장고 안에 고개를 처박고 냉장고 소리를 따라 울었다는 여자의 이야기를 떠올리는 사람은 별로 없으면 좋겠다고.


다시 소설 이야기를 하자면, 소설은 “냉장고는 울어야 제 일을 해낼 수 있다”(p.76)고 말한다. 그러니 여자가 우는 것 역시 “제 일을 해내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p.76)고.


*

신이 우리에게 언제나 감당 가능한 만큼의 적당한 슬픔만 주면 참 좋겠지만 대개 그 슬픔의 양을 조절하는 건 우리 스스로의 몫이다. 소설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제 일을 해내기 위해 반드시 울어야 하는 것이다. 조금 괜찮아진 날이면 슬픔의 기억이 되어버린 소금 사탕을 입 안에 넣고 요리조리 굴려보며.


그렇게 채우고 비우다 보면 그것조차 습관이 되지 않을까. 슬픔이 습관이 되면 삶은 더 나아질까, 확실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지만. 앞으로도 내내 함께 살아야 한다면 낯선 것보다야 익숙한 것이 낫지 않겠나. 가장 절망적인 마음에서 찾아낸 희망을 적어본다.


“눈물은 소리가 없어서 그것을 증명하려면 입이 필요하다. 입이 있어도 소리가 전해지지 않는다면 그 또한 눈물을 증명할 수 없다. 눈물은 금방 말라버리기에. 그래서 여자는 눈물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방법을 알고 있다.”
-장은진 <울어본다> p.66
“여자는 냉장고 속 깊숙이 상체를 숙여 자신을 집어넣는다. 그러고 소리 내 울어본다. 한 가지 이유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여러 가지 문제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제 일을 해내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
-장은진 <울어본다> p.76
“울자 차가운 눈물이 흐르고 여자의 몸은 따뜻해진다. 따뜻해지기 위해서는 차가운 게 필요하고 차가워지기 위해서는 따뜻한 게 필요하다.”
-장은진 <울어본다> p.76

슬픔과 함께 사는 법을 익혀가는 중, 모두의 냉동고를 응원하며.



김치 오이 볶음밥

필요한 재료: 김치, 청양고추 2개, 편 마늘 15개, 식용유, 계란 2개, 오이 1개

1.

김치를 썰어준다.


(잘게 잘게 썰린 김치에서 드러나는 아빠의 칼 솜씨. 부럽습니다 사부.)


2.

편 마늘 15개와 청양고추 2개를 작게 썰어준다.


(사진을 받고 도대체 저 하얀 것은 무엇인가 궁금해져 가족 단톡방에 물어봤는데 마늘에 싹이 난 것이라고 한다. "마늘에 싹이 났는데 먹어도 돼?"라고 묻자 전직 영양사 조여사는 상관없다고 했다. 마늘을 오래 보관하기 위해 햇볕에 말리는데 그 과정에서 싹이 나는 것이라고. 덧붙이자면 엄마는 보통 그냥 다 먹어도 된다고 한다. 유통기한이 많이 지난 것도 다 먹어도 된다고 한다. 웬만하면 권위에 복종하는 나이지만 엄마의 이런 말들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나를 두고 생체 실험을 하는 것은 아닌지...^^)


3.

프라이팬에 식용유 두 큰 술을 두른 뒤 썰어 둔 고추와 마늘을 볶는다.


4.

김치 투하. 같이 열심히 볶아준다.


5.

오이 1개를 작게 썰어준다.


(문제의 오이 등장. 안 그래도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오이인데 와중에 오이를 김치볶음밥에 넣는다니. 따뜻한 오이 용납할 수 없어...!

아빠는 나의 이런 엄청난 반발을 예상했는지 오이 사용법에 대해 첨언을 덧붙였다.)


아빠 曰: 오이는 미리 썰어 놓은 뒤 김치가 다 볶아지면 거기에 넣고 비벼라. 식감을 위해 따로 넣어 비비는 것임.  


(요리사까지 선 긋는 오이. 환영받지 못하는 오이의 삶이란, 오호통재라.)


6. 계란 후라이후라이(왜냐면 계란 두 개 썼으니까^-^) 만들기


7.

완성!


(계란은 도대체 어떻게 놨길래 다 흘러내린 것인지... 아무튼 오이의 식감이 굉장히 궁금해진다. 아무리 프라이팬에 같이 볶은 게 아니라도 이미 볶아진 재료들 때문에 따뜻해졌을 텐데. 흠. 나는 도전할 생각이 없으니 혹시나 누군가 이걸 보고 도전하게 된다면 맛이 어땠는지 솔직하게 말해주시길 바랍니다. 엄마랑 아빠한테 물어봤자 분명 "맛있어! 얘가 아직 맛을 모르네." 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레시피/사진 출처: 모두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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