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하나로는 부족한 구원에 대하여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 리뷰에서는 '그것'이 메시아와 부처를 동시에 상징한다고 보았습니다.
신의 영역이라 일컬어지는 불사(不死)를 지닌 존재는 과연 '진짜'인가.
이곳에 진짜는 없었다.
영화 초반 마을을 위협하는 어두운 악귀인 듯 묘사되었던 '그것'은 기실 온 세계를 뒤덮은 어둠을 거두기 위해 온 신이었음이 드러난다. 추악한 모습을 띠고 잔혹한 탄생을 맞이한 '그것'이 사실은 선한 의도를 가진 구원자였음이 명확해지며 신과 악귀의 경계는 흐트러진다. 이처럼 고착화된 구원자의 이미지를 전복한 영화는 '과연 무엇이 신인가?', 혹은 더 나아가 '우리는 무엇을 신이라 보는가?'라는 다분히 냉소적인 질문을 지고 관객 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이미지의 반전을 꾀해 '신'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로 돌아간 영화는 구원의 의미를 되묻는 셈이다. 그리고 '극악'을 멸하게 함으로써 스스로 멸한 구원자의 끝을 그려내며 구원자는 구원이 아닌 파멸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존재였음이 명확해진다. 결국 구원은 인간의 몫이다.
'그것'이 구원을 시작하기 이전 소멸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짐승이길 자처했을 때 '그것'은 이미 구원자(예수)였고, 그에게 물어뜯긴 다리를 가지게 된 금화는 그 희생의 시작점에 위치함으로써 베들레헴의 수많은 살해당한 아이들을 상징한다. 요컨대 '그것'의 쌍둥이 동생인 금화의 탄생은 앞으로 있을 영월에서의 연쇄살인의 시작에 대한 선포인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금화는 또 하나의 구원자다. 그는 광목을 자신의 쌍둥이 언니에게 이끌며 은폐된 진실을 비춘다. 쌍둥이 언니가 구원자의 언어로 광목으로 하여금 듣고 알게 할 때, 금화는 이미 구원자에게 살덩이를 헌납하는 것으로 그에게 생을 보장하였다. 또한 실제로 자신이 의도한 살해에서 '그것'을 지켜냄으로써 구원자를 구원한다. 이때, '그것'의 일방적인 행위(다리를 갉아먹는 것; 피를 나누는 것)로 금화의 의도와 무관하게 공유되었던 '구원자성'은 금화 스스로 구원자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통해 강화된다. 끔찍한 것인 줄만 알았던 역사는 일순 연대로 탈바꿈되어 사태는 역전되고 자매는 서로의 생존을 보장함으로써 '구원'을 완성시킨다. 또한 베들레헴에서 살아남은 아기는 예수 단 하나였다는 점에서 99년생의 여자아이는 모조리 죽임 당한 영월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한 아이 - 즉, 금화가 메시아를 상징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신'이었던 금화와 '그것'이 '구원자성'을 분리 보존한다는 설정은 이 영화의 매력을 배로 끌어올린다. '구원자성'을 독점하는 유일신이라는 인식의 틀에서 벗어나 희생의 고통과 '구원자성', 전부를 나누어 가지는 두 자매를 등장시키며 인식의 전환을 도모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찬란한 기적과도 같은 단 하나의 메시아를 내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로는 부족한 구원을 역설하며 힘을 보태야 할 이유를 마련한다. 무엇이 구원이고 구원자는 또 누구이며, 그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며 사유의 장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구원은 극악의 소멸에서 시작되는가. 극악을 멸함으로써만 메시아가 메시아로 입증된다면 이 세계의 역학관계는 지나치게 악 쪽으로 치우쳐진 게 아닌가. 선재하는 악은 누가 낳았으며 구원자는 왜 악을 영원토록 부재케 하지 않나.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 악도, 메시아도 멸한 세상에는 무엇이 남는가. 한낱 인간이 남아 악도 선도 아닌 균형을 지키며 사는 것인가.
용을 뱀으로 만든 것은 인간의 욕망이다. 인간 안에 악이 있다. 극악과 메시아가 동시에 멸한 세계에 악을 똬리를 가진 인간이 남았는데 과연 구원은 이루어진 것이 맞는가.
메시아는 과연, 누구를 구원한 것인가.
악이 멸하였는 데에도 크게 바뀌지 않은 여전한 세상 앞에, 신의 자리를 묻는 박 목사의 목소리가 선하다. 잔잔하여 더 애달팠던 그 물음 -
신이시여, 어디 있나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