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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월 Apr 16. 2021

성격 급한 친구의 프렌치 요리

설익은 우리 삶을 응원해 (feat. 혁오 <tomboy>)




지난주, 이사를 한 지도 이미 수어 달이 된 S의 늦은 집들이가 있었다. 사는 것이 바쁘다는 이유로 꽤 오래 만나지 못한 친구였다. 집들이가 있기 며칠 전, S는 M과 S와 나 이렇게 총 세 명으로 구성된 단톡방에 집들이 메뉴는 프렌치라는 어마어마한 소식을 전달했다.


언제나 실행력이 넘치는 S지만, 우리들 기억 속의 S는 요리에 그렇게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친구는 아니었다. 음식을 직접 하기는커녕 제대로 된 한 끼 식사를 하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바쁘게 사는 친구였으니 요리 실력이 느는 게 더 이상할 일이었다. (논외로, 이 친구가 정말 음식 섭취를 게을리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 계기가 있었다. 체력증진을 위해 PT를 받던 도중,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헬스 트레이너가 S에게 "흙이라도 퍼먹어라"라고 말했던 것. 종종 이 이야기를 떠올릴 때면 마치 내가 헬스 트레이너가 된 것처럼 그 절박함에 이입이 된다.)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S의 프렌치 요리 선언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고, 내심 '설마 진짜 프렌치 요리를 할까' 싶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S의 집에 갔을 때, 우리를 놀라게 한 건 프렌치 레스토랑 못지않은 분위기와 음식 재료들이었다. "뭐야, 갑자기 왜 그래?"라는 말에 S는 "이럴 때도 있어야지"라고 말하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요리에 집중했다.


아뮤즈 부쉬부터 디저트까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친구는 밥을 먹다 또 주방에 가서 음식을 하고 또 돌아와 이야기 나누기를 반복했다. 음식을 하느라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S가 영 마음에 걸려 배부르니 이쯤 하자는 말을 해보기도 했지만 S는 꿈쩍이 없었다. 셰프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말라는 듯 결연한 모습이었다. 그 덕에 M과 나는 긴 시간에 걸쳐 아주 은은히 배를 채웠다. 은은히 채운 배는 쉽게 꺼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느린 식사 테이블에선 수없이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우리가 가진 것에 대해 이야기했고 갖지 못한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젊음의 의미와 젊음이라는 함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코앞에 있는 것 같은 성공의 유혹에 대해, 좀체 닿을 길 없어 보이는 성공의 희미함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각자가 처한 위치가 다르고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S는 조바심이 난다고 했다. 조금만 더 뻗으면 성공이 있을 것 같다고, 자꾸만 지름길이 보인다고 했다. S는 잘하고 싶은 사람이자 잘 되고 싶은 사람이었다.



젊은 우리 나이테는 잘 보이지 않고
찬란한 빛에 눈이 멀어 꺼져가는데

혁오 - <Tomboy>


농익기에는 아직 너무 파릇파릇한 우리. 우리에겐 세월과 경험을 뒤따르는 내공도, 노하우도 그저 부족하기만 하다. 그뿐인가, 젊음은 너무도 환한 빛에 에워싸여 있다. 그 속에서 내가 있는 쪽만 어두운 것처럼, 내가 곧 어둠인 것처럼 느껴지는 날도 있을 것이다.


찬란한 빛에 눈이 멀어 꺼져간다던 혁오의 노랫말처럼, 우리는 젊기 때문에 찬란한 빛 앞에서 더욱 무력해진다. 어쩌면 젊음은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빛이 되게 하는 가능성의 시기이자 빛에 모조리 잡아먹힐 수도 있는 위험한 시기일지도 모른다. 위태로운 줄타기를 지속하는 것 자체가 기적일지도.


빛에 삼켜지지 않고 저만의 나이테를 몸에 둘러 마침내 살아 남기 위해 다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방향이다. 어떤 무늬와 어떤 굵기의 나이테일지 결정하는 것은 온전히 스스로의 몫이다. 물론 생각한 대로 삶이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예상치 못한 삐뚤빼뚤한 선이 생길지도 모르고, 이을 수 있다 생각한 선이 중간에 갑작스레 끊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가고자 하는 방향이 있다면, 우리는 다시 궤도를 찾을 것이다.


오직 바라는 것은 잘려나간 뒤, 햇볕에 드러난 나이테의 모양을 보고 내가 가장 흡족한 것. 새긴 자국에 떳떳한 것.  


잊지 말자. 은은히 채운 배는 쉽게 꺼지지 않는다. 급하게 먹은 것은 꼭 체하게 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의 방향대로 천천히, 하지만 정확하게 가야 한다.


마무리 역시 같은 노래의 노랫말로 하려 한다.



불이 붙어 빨리 타면 안 되니까
우리 사랑을 응원해





성격 급한 S의 느릿느릿 프렌치 요리. 정말 정말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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