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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월 Oct 03. 2020

새로운 추석, 달과 어른

진짜 내 소원을 찾아서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도대체 명절은 왜 있는지 모르겠다는 한탄 섞인 글을 보았다. 글 밑으론 각자가 겪은 명절 진상썰이 댓글로 달려있었고 스크롤은 끝없이 내려갔다. 나는 그 글에 ‘전국 진상 자랑’이라는 제목을 붙여주었다.


언제부터인지 명절이 더는 즐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루 종일 풍겨오는 기름 냄새가 거북하게 느껴졌고 한 상 차려진 맛있는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는 여자 어른들의 지친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선뜻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 이곳저곳에서 날아왔고 나는 자주 우물쭈물했다. 가끔은 정말로 무례한 질문도 있었다. 그러나 방금 나한테 뭘 물어본 사람은 나와 어떤 관계의 사람이지? 하는 의문이 들 때면 이내 전의를 상실했다. 이 모든 상황이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짐작건대 명절의 비극은 ‘나 좀 컸다’ 싶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까짓 쉬는 날 며칠 생긴 걸로, 두둑해진 주머니로 퉁치기엔 느끼는 불편함과 불쾌함이 너무도 거대했다. 그 무렵 나는 명절 스트레스라는 주제로 쏟아지는 기사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명절이 더는 반갑게 느껴지지 않는 어느 날,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아, 내가 어른이 되었구나.


일 년에 한두 번 반갑게 인사하던 친척들과의 만남을 꺼려하는 스스로를 발견하며 어른이 된다는 건 퍽 쓸쓸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묘한 안도감이 웬 말인가. 이토록 퍼석한 인생이라니.






이번 추석에는 멀리 친척집에 가지 못했다. 집에서 조촐하게 부모님과 하루 두 끼 정도를 간단히 챙겨 먹었고 원 없이 늦잠을 잤다. 멀리 가지 않아서인지, 명절 음식이 없어서인지, 불편하게 눈치를 보는 일이 없어서인지 추석이 추석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토요일, 일요일을 지나 다시 한 번 토요일, 일요일이 온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럼에도 추석을 추석으로 만드는 것이 있었다면 그건 다름 아닌 보름달이었다. 보름달이 뜨면 소원을 빌어야 한다고 했다. 창가에 서서 소원을 생각했다. 오래오래 건강하게 해 달라, 하는 일 다 잘 되게 해 달라. 와 같은 뻔한 소원이 입가에 맴돌았다.


그리고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아마도 내게 소중한 사람들. 소중한지도 잊고 살다가 소중한 것에 대해 생각할 때면 문득 떠오르는 그런 사람들의 얼굴 말이다.


명절이 꼭 있어야 한다면 이게 그 이유가 될 수 있진 않을까 생각했다. 매일매일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내 소원이 뭐였는지도 까맣게 잊고 살던 날들 속에서 나를 잠깐 멈춰 세우는 것. 자연의 의지로 스스로 밝게 빛나는 것에 잠시나마 내 미래를 의탁해보는 것. 내가 마음 쓰는 이들이 누구인지, 그들의 얼굴을 하나씩 찬찬히 살피게 하는 것.


그 밤 나는 나만의 소원을 찾기 위해 골몰했다. 성의 있는 기도 시간을 갖기 위함이었다. 쉽게 쉽게 해치우고 싶지 않았다. 소중한 사람들이라면 그에 걸맞게 소중히 대해주고 싶었다. 소중히 대해야 할 것에는 나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나를 두고 비는 소원에 소홀하고 싶지 않았다. 남을 두고 비는 소원에 온 마음을 기울이고 싶었다.


이 마음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 나는 이 마음이 진짜 어른의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나를 비롯한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해 마음 들여 기도하는 것, 기도 내용을 고심하고 고민하여 말을 섬세하게 골라잡는 것, 그런 것들 말이다.  


명절이 싫고, 낯선 친척과의 모임이 꺼려질 때마다 나는 자주 서글펐다. 어른의 세상에 가까워질수록 내가 점점 더 많은 사랑을 잃으며 사는 건 아닐까 문득 두려웠다. 그러나 이번 명절은 그리 쓸쓸하지 않다.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과 음성이 밤하늘에 가득했다. 사랑하고 있다, 는 감각이 주는 안도감이 굉장하다.


바쁘게 지나쳤던 모든 순간에서 사람을 끄집어내 그들을 생각하는 마음을 말로 뱉어 보는 것. 환한 달이 있는 명절의 의미는 이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진짜 어른이 된 기분이다.





덧:
 오늘 빌었던 소원 중 절대 잊고 싶지 않은 소원이 하나 있어 이곳에 다시금 적어본다.


가난이 사랑을 위협하지 않을 정도로만 돈을 벌게 해 주세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이 정도는, 이 정도 소원은 좀 들어줘도 되지 않나. “체면 없는 신”(『자기 앞의 생』)을 향해 무람없이 눈을 부릅떠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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