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분홍 착각

눈이 속은것이 아니라,마음이 먼저 봄을 그려낸것이다

by 이혜원




오늘은 강아지요미와 함께 집 주변을 천천히 걷는 날이었습니다.


특별한 목적 없이,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봄볕이 좋다고 하니 나온 것이지만, 사실 봄이 정말 왔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나섰습니다. 겨울이 어찌나 길었던지, 해가 머리 위에 환히 떠 있어도 쉬이 믿어지지 않는 그런 날들이 있지 않습니까.


강아지요미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코를 바닥에 바짝 대고 무언가를 열심히 탐색하고 있었습니다. 그 작은 생명이 세상의 냄새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동안, 나는 그 뒤를 느릿느릿 따라가며 봄볕을 등에 담고 있었습니다.


햇살은 참으로 따스했습니다. 살갗을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살며시 얹히는 듯한 온기. 바람도 그러했습니다. 날카롭지 않고, 서두르지 않고, 그저 볼을 스치고 지나가는 결이 마치 누군가의 손길처럼 온화했습니다. 그런 볕과 바람 속에 잠시 서 있다 보니, 정신이 잠깐 어딘가로 호로록 빠져나간 것만 같았습니다. 몸은 분명 이 거리에 서 있는데, 마음은 벌써 어딘가 다른 계절 속에 가 있는 것처럼.


그때였습니다.


저 멀리, 나뭇가지들 사이로 무언가 부끄럽게 연분홍빛을 발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가슴이 먼저 알아챘습니다. 머리가 채 판단하기도 전에, 심장이 먼저 작게 뛰었습니다. 어머나!!!어느새 봄꽃이 피었네. 저렇게 수줍게, 저렇게 조심스럽게. 아직 앙상한 가지들이 겨울의 흔적을 다 지우지 못한 사이, 진달래가 먼저 피어났구나. 혹은 벚꽃인가.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습니다. 연분홍이면 충분했습니다. 그 색깔 하나로 가슴 한편이 환해지는 기분이었으니까요.


설레었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이런 설렘이 찾아온다는 것이 조금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봄꽃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두근거리는 마음이라니. 하지만 그게 또 봄이 주는 선물 아니겠습니까. 나이와 상관없이, 그 연분홍 앞에서는 누구나 잠깐 어려지는 것이.


그런데.


들뜬 마음을 붙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것은 꽃이 아니었습니다.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살짝 내비치던 것은, 수줍은 빛깔의 건물이었습니다. 연분홍 페인트로 칠해진 벽면이, 마치 꽃처럼 가지 사이에 끼어 나를 잠깐 속인 것이었습니다.


어이없어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뭉클했습니다.


아, 내가 봄을 이토록 기다리고 있었구나.


보고 싶은 것을 보는 마음. 그것이 얼마나 간절했으면, 건물 한 면을 꽃으로 착각했을까요. 눈이 속은 것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봄을 그려낸 것이겠지요. 진달래가 피기도 전에, 벚꽃이 망울을 열기도 전에, 나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봄꽃이 환하게 피어 있었던 것입니다.


성급하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그만큼 살아 있다고 해야 할까요.


겨울을 나고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언제나 꽃보다 조금 앞서 있는 것 같습니다. 꽃이 피기 전에 먼저 두근거리고, 봄이 오기 전에 먼저 온기를 느끼는 것. 그것이 부끄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그 마음 덕분에 우리는 아직 오지 않은 봄도 이미 충분히 아름답게 살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요미는 여전히 코를 킁킁거리며 자기만의 세계를 탐험하고 있었고, 나는 그 자리에 잠시 멈추어 봄볕 한 광장에 서 있었습니다. 아직 진달래도, 벚꽃도 피지 않은 거리였지만, 햇살은 분명 봄의 것이었고, 바람도 분명 봄의 것이었습니다.


마음만은 이미 봄 한가운데, 꽃 핀 길 위에 서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한 하루였습니다.


봄은 언제나 눈보다 마음이 먼저 알아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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