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안 보이지?" / 탈개인화
하루에도 수십만 개의 댓글이 인터넷에 쏟아진다. 그중에는 얼굴 없는 공격이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도 있다. 특정 인물의 사생활을 집요하게 파헤치고 조롱하는 악성 댓글 대부분은 ‘익명’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있다.
이것은 단지 인터넷 문화의 일탈이 아니다. 인간은 익명성이라는 조건에 놓일 때, 현실 속에서도 얼마든지 악해질 수 있다.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는 이러한 인간의 심리를 낱낱이 파헤친다. 전염병과 격리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인간성이 어떻게 무너져 가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우리가 ‘사람다움’을 유지하기 위해 무엇을 붙들어야 하는지를 묻는다.
<이름도, 얼굴도 없을 때의 인간>
영화는 한 남자가 운전 중 갑작스럽게 시력을 잃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를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는 한 행인의 호의는 곧 배신으로 뒤바뀐다. 그는 남자가 정말 앞을 못 보는지 확인하기 위해 얼굴 앞에서 손을 휘저어보고, 혓바닥을 내밀며 시험한 뒤, 그의 차를 훔쳐 달아난다. 타인이 나를 식별할 수 없는 상황, 그 무명의 순간에 인간은 얼마나 쉽게 양심을 내던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러한 익명성이 집단화될 때, 그 파장은 훨씬 더 커진다.
<집단 속 익명성과 탈개인화>
눈이 먼 이들은 전염병처럼 도시 전역으로 퍼지고, 정부는 이들을 한 시설에 강제 격리한다. 격리시설에서 사람들은 이름 없이, 번호나 특징으로만 불린다. 그들은 이름이 지워졌기에 사회적 정체성과 도덕적 책임 또한 지워져가고 있다.
시설 안은 점차 무법지대로 변한다. 사소한 갈등에도 험악한 말이 오가고, 누군가는 어디서나 옷을 벗고 돌아다니며, 배설과 성행위조차 통제되지 않는다. 볼 수 있는 기능을 잃고, 아울러 타인의 고통을 느끼는 감각까지 잃어버린 사람이 늘어가면서 수용소는 인간의 존엄이 바닥까지 추락한 곳이 되어버린다.
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는 “개인이 집단 속에서 식별되지 않을 때, 도덕적 억제가 약화되고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 분출된다"라고 말했다. 이를 ‘탈개인화(deindividuation)’라고 한다. 익명성과 집단의 조건이 겹칠 때, 인간은 책임감과 윤리를 상실하기 쉽다.
<통제하는 자들의 탈개인화>
탈개인화 현상은 수용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을 감시하는 관리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관리자들도 자신이 드러나지 않는 환경을 가지고 있다. 수용자들은 관리자들의 이름도, 얼굴도 알 수가 없다.
의료품을 요청하는 수용자들에게 관리자들은 총을 겨누며 그들을 위협한다. 그들은 단지 격리해야 할 대상일 뿐, 보호나 존중의 대상이 아니라는 인식 때문이다. 관리자들은 죽은 시신을 묻으라며 삽 하나만 던져주고, 수용자가 그것을 찾으려 허둥거리는 모습을 조롱하며 즐긴다. 익명성의 권력은 그 어떤 잔혹도 가능하게 만든다.
<심화되는 탈개인화, 그리고 그 반대편>
시설은 점점 더 혼란에 휩싸이고, 인간들은 도덕의 한계를 넘어서기 시작한다.
폭력과 착취가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이름이 지워지고, 책임이 흐려지자 타인을 착취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선택이 되어버린다.
건물을 장악한 자들은 음식을 무기로 삼고, 처음에는 귀중품을 요구하더니, 점차 여성의 몸을 요구한다. 굶주림에 지친 이들은 그 요구를 받아들이고, 남편들은 자신의 아내가 희생되는 장면 앞에서 침묵한다. 공감의 눈을 잃은 인간들은 더 이상 서로를 지탱할 수 없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저항이 움튼다. 인간성을 되찾으려는 반격이 시작되고, 건물은 방화와 살인 속에서 무너진다. 그리고 살아남은 이들은 탈출을 시도한다.
<익명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지키는 자>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의사의 아내다. 그녀는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사람이다. 그녀는 남편을 돕기 위해 스스로 수용소에 들어갔지만, 점차 자신만이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책임이자 죄책감으로 다가온다. 그 누구도 그녀에게 의무를 부여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스스로 돌봄과 책임의 자리에 선다.
하지만 그녀는 점점 심리적으로 무너져간다. 시계태엽을 감는 걸 잊었다며 오열하는 장면은, 무너지는 일상의 감각과 함께 그녀의 무력감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남편은 그녀가 더 이상 모두의 간호사가 아닌, 자신만의 아내로 있어주길 바라지만, 그녀는 끝까지 인간에 대한 도리를 선택한다.
결국 그녀는 남편과 사람들을 이끌고 수용소를 탈출해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다.
아무도 그녀를 보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그녀는 이타심을 지킨다. 깨끗한 환경을 마련해주고, 음식을 제공하는 등 그들을 돌보아준다.
돌봄을 받는 자들 역시도 서로를 존중하는 생활을 유지한다. 무명의 혼돈 속에서도 그들의 인간다운 행동이 가능한 이유는, 타자에 대한 감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되기 위하여>
눈먼 자들의 도시는 전염병이라는 설정을 빌려, 인간 사회의 가장 어두운 심리를 비춘다. 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는 “사람은 자신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인식만으로도 행동의 기준이 달라진다"라고 했다. 환경과 조건에 따라 사람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를, 이 영화는 집요하게 파고든다.
영화는 묻는다. "우리는 누구인가? 어떤 조건에서 인간일 수 있는가?"
익명성은 인간을 쉽게 ‘비인간’으로 만든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끝까지 ‘보는 자’가 되기를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가능성 또한 본다. 이 영화의 분명한 메시지는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실명’이라는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각자의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나는 눈이 멀었는가? 아니면 아직, 보고 있는가?
ㅡ익명 뒤에 숨은 우리ㅡ
오늘날 집단 속에서 인간이 자제력을 잃고 충동적으로 변할 수 있는 사례를 살펴보자.
1) 할로윈 이벤트 – 가면 뒤의 해방감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는 할로윈 이벤트를 들 수 있다. 할로윈 밤이면 분장을 한 수많은 젊은이들이 시내 중심가에 몰려든다. 이들은 평소와는 다른 모습으로, 가면이나 특이한 복장을 하고 거리를 활보한다. 얼굴이 가려졌다는 사실은 심리적으로 억제를 풀게 만들고, 군중 속에 있다는 사실은 정체성을 감춘다. 이런 조건 아래에서는 일부가 과격한 복장과 행동으로 쉽게 선을 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익명성과 집단의 힘이 결합된 전형적인 탈개인화 현상이다.
2) 정치 집회 – 주장인가, 분노의 배출구인가
정치적인 집회나 시위 현장에서도 비슷한 현상을 볼 수 있다. 본래는 특정한 정치적 주장과 요구를 외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격앙되고, 목적보다 분노와 욕설이 앞서기 시작한다. 집단 속 해방감에 빠진 일부는 마치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듯이 격한 표현을 쏟아낸다. 이런 모습은 정치적 신념의 표출이라기보다는, 익명성과 집단 심리가 결합되어 나타나는 심리적 해방의 결과일 수도 있다.
3) 스포츠 관중석 – 책임 없는 야유
스포츠 경기장 역시 탈개인화가 드러나는 장소다. 소수의 관중만 있을 때는 삼가는 말도, 수천 명의 관중 속에 섞이면 거리낌 없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군중 속에 묻혀 있으면 자신이 특정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평소라면 하지 않을 폭언이나 야유를 쉽게 쏟아낸다. 관중이 많아질수록 책임의식은 약해지고, 공격적인 감정은 더 쉽게 표출된다.
출처 : 대인관계 심리학-유우키 유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