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심리학 <다음 소희>

소희가 그때부터 달라졌던 것 같아서요 / 브론펜브레너의 생태학적체계이론

by 예심


학교폭력이나 학업 스트레스로 인해 비극적인 선택을 하는 학생들의 소식은 해마다 되풀이된다.

아이들이 건강한 어른으로 자라지 못하고 고통 속에 머무는 이면에는, 언제나 단순하지 않은 원인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 문화와 제도의 빈틈, 역기능적인 가정, 주변의 무관심과 침묵하는 분위기 ㅡ 모든 것이 서서히 한 사람을 절망의 늪으로 밀어 넣는다. 그렇게 괴로움의 신호는 어느 체계에서도 제대로 포착되지 못한 채, 끝내 비극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누구도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원인은 개인의 성격적 취약함이나 의지 부족으로 축소되기도 하고, 책임의 무게는 서로에게 미루어진다.


발달심리학자 **브론펜브레너(U. Bronfenbrenner)**의 생태체계이론은 이러한 비극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유용한 틀을 제공한다. 그는 인간의 발달이 개인 내부의 요인만이 아니라, 가정·학교·직장·문화·제도 등 다양한 환경적 체계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의 이론은 인간을 중심으로 미시체계, 중간체계, 외체계, 거시체계, 그리고 시간체계로 확장되며, 우리가 속한 세상이 어떻게 한 사람의 내면과 운명에까지 영향을 미치는지를 드러낸다.


영화 《다음 소희》는 특성화고에 재학 중인 한 여고생이 학교의 소개로 취업을 나갔다가 겪게 된 비극을 다룬다.

이 작품은 한 개인이 ‘건강한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사회의 왜곡된 얼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브론펜브레너의 생태체계이론을 바탕으로, 소희가 어떤 체계 속에서 점차 고립되어 갔는지, 그 구조적 원인을 살펴보고자 한다.






<미시체계>


미시체계는 개인이 직접 상호작용하는 가장 가까운 환경이다. 가정, 학교, 직장은 소희에게 안전한 울타리가 되어주었을까?

소희는 부모와 함께 살지만 정서적 교류가 없다. 어머니는 식탁에서 TV를 보며 식사를 할 뿐, 딸에게 살가운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다. 아버지는 생계의 무게에 지쳐 대화를 나눌 여력이 없다. 생계의 피로와 근심 때문에 소희 부모는 딸에게서 전과 다른 분위기가 난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들의 무심함은 악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먹고사는 일’에 치여 정서적으로 둔감해져버린 우리네 부모의 초상이라고 할 수 있다.

직장 생활의 괴로움으로 소희는 손목을 그어 자해를 하는데, 응급실에서 깨어난 직후 오히려 엄마에게 배려의 미소를 짓는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랬어"

그 말은 부모의 근심을 덜어주기 위해 자기감정을 숨겨온 오랜 습관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나 회사 그만둘까?라고 조심스레 묻는 장면도 미시체계의 붕괴를 드러낸다. 그 절박하고도 희미한 목소리가 엄마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직장 역시 소희에게 잔혹한 미시체계였다. 소희가 소속된 팀은 해지방어팀이었다. 고객의 서비스 해지를 막기 위해 설득하는 일을 하는 소희. 고객들은 자신들의 요청이 즉시 처리되지 않자 불만과 고성을 터뜨렸고, 소희는 긴장감과 모욕감을 견딘다. 게다가 해지방어를 얼마큼 성공했는지 적나라한 실적 공개와 뒤따르는 질책, 동료와 경쟁을 부추기는 분위기, 정당한 임금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않는 구조, 회사 내부고발 유언장을 작성한 뒤 자살한 팀장...... 그 속에서 소희는 점점 생기를 잃어간다. 그럼에도 소희는 성실하게 맡은 일을 하고자 안간힘을 쓰지만, 그 성실함조차 동료들에게 부담으로 돌아올 뿐이다.

"네가 목표치 올려놔서 다들 힘들잖아.”

경쟁과 압박만 남은 공간에서 어린 소희는 점점 위태로워진다.

학교는 어떠했을까. 취업을 했지만 아직 고등학교 3학년인 소희는 졸업 전이므로, 학교는 그녀의 안위에 관심을 가져야 했다. 하지만 담임교사는 소희의 상태보다는 자신이 맡은 행정업무에만 신경을 쓴다. 학생의 일상보다 학교의 취업률 실적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학교로 돌아올 생각 말고, 거기서 꼭 버텨야 한다”

그 말은 소희의 근심을 더욱 가중시키고, 일이 힘들다고 담임에게 호소하던 그녀의 절박한 목소리는 사회생활은 다 그렇다는 말로 무시된다.






<중간체계>


중간체계는 미시체계들 간의 연결 관계를 뜻한다. 소희의 주변에는 그 연결이 존재하지 않았다. 가정–학교–직장이 서로 협력하며 학생의 발달을 지지하는 구조가 되어주었어야 했지만, 그 소통이 단절되어 있었던 것이다.

담임은 부모에게 단 한 통의 전화도 하지 않았고, 실습 서약서에 아버지 사인받아오라는 말만 남긴다.

그녀의 일터는 사회적 경험이 많은 성인도 견디기 힘든 감정 노동의 현장이었다. 학교는 어린 학생들의 노동 현장과 적응도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회사와 가정과의 최소한의 의사소통이라도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사무적인 태도로 세미한 관심 없이 실습생 적응도와 만족도 조사 등에 모두 '상'으로 체크 표시할 뿐이다. 행정적 효율과 관행으로만 움직였던 담임은 가장 중요한 것을 보지 못했다.

또한 회사에 적응하지 못해 학교로 돌아온 학생들이 더러 있었음에도, 학교는 그 사실을 계기로 회사 실태를 조사하거나 협력 관계를 재검토할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다. 오히려 퇴사한 학생들에게

“그 회사에서 이제 우리 학교 학생 안 받으면 어쩌냐"

라는 책망을 퍼붓는다. 그런 식의 태도를 보이며 학교로 돌아온 학생들에게 빨간 조끼를 입혀 구분하고 낙인을 찍는다. 화장실 청소나 쓰레기장 관리 같은 일을 맡기며, 오직 취업률 통계가 낮아지는 것만을 두려워한다.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학생들을 압박할까. 알고 보면 맥락이 있다.

“취업률이 떨어지면, 학교가 교육청에서 받는 인센티브가 줄어요"

교감의 그 한마디가 모든 것을 드러낸다. 학생들은 수치로 환산된 존재였다. 소희는 회사에서는 해지 방어율을 올려주는 도구로, 학교에서는 취업률을 올려주는 수단으로 취급되었던 것이다.

결국 소희는 어디에서도 보호받지 못한다.

그녀를 지탱해야 할 다리들이 하나둘 무너졌을 때, 소희는 그 다리 아래로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외체계>


외체계는 개인이 직접 참여하지 않지만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구조다. 소희의 죽음은 단지 한 회사의 문제가 아니라, 그 위에 놓인 제도적 방관과 책임 회피의 결과이기도 하다.

소희가 입사 한지 얼마 안 되어 같은 부서의 팀장의 자살사고가 있었다. 그는 유서에 노동착취와 임금 문제를 고발했지만, 수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회사 관계자들은 자신들의 회사가 부당하지 않다는 갖가지 주장을 내놓으며, 협박과 함께 산재를 거부했고, 힘없는 유가족은 무력하게 합의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건은 ‘단순 자살’로 종결되어버린다.

몇 달 뒤, 같은 구조 속에서 소희도 생을 스스로 마감해버린 것이다. 제때 수사를 안한 결과다. 소희 사건 담당 형사가 문제의식을 느끼고 사건을 깊이 파고들기 위해 광역수사 지원을 요청하자, 형사과장은

“그건 노동청 소관이다”

라며 사건을 밀어낸다.

책임소재 떠넘기기는 교육청도 마찬가지다. 사건의 책임을 묻자, 자신들은 그저 교육부의 평가를 따를 뿐이라고 말한다.

"취업률 떨어져서 우리 교육청 인센티브 떨어지면 밑에 학교 몇 개는 그냥 문 닫습니다. 교육부에서 취업률만 보니까요. "

형사는 이 거대하게 얽힌 구조 앞에서 무력함을 느낀다. 혼자 힘으로는 이런 관행을 바꾸기 어렵다는 현실을 실감한 것이다. 체계를 바로잡기 위해 소신 있게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사람을 위협하는 구조적 연결을 막을 수 있을 테지만, 위험을 체감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자본주의 체계의 보이지 않는 폭력. 그 사이에서 어린 생명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구조의 틈에서 그렇게 꺼져갔다. 체계가 맞물려 한 사람의 숨통을 조금씩 조이게 한 것이다.






<거시체계>


거시체계는 사회의 가치관과 문화, 이념, 그리고 시대정신을 포괄한다.

소희의 비극은 단지 개인의 불운이나 특정 제도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한국 사회 전반에 스며든 뿌리 깊은 문화적 통념과 맞닿아 있다.

“참아야 한다.”

“사회생활은 원래 그런 거야.”

“윗사람 말 잘 들어야지.”

성숙과 예의를 가르치는 훈계처럼 들리지만, 실상은 세대의 윤리로 포장된 폭력이다.

이 사회는 여전히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미숙함으로 간주하고, 침묵과 순응을 미덕으로 여긴다. 억울함을 표현하기보다 견디는 것이, 부당함을 고발하기보다 버티는 것이 어른스러움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런 문화 속에서 자란 개인은 자신이 느끼는 분노나 슬픔을 건강하게 표현하지 못한 채 내면에 쌓아두며, 결국 스스로를 병들게 만든다.

이 거시체계는 인간 발달을 지지하지 않고 오히려 소진시키는 생태환경인 것이다.




<시간체계>


시간체계는 개인이 속한 시대의 역사적 변화와 사회적 흐름을 포함한다. ‘공감’보다 ‘성과’로, ‘관계’보다 ‘결과’로 평가받는 오늘의 현실은 결코 갑자기 생겨난 현상이 아니다.

한국 사회는 전쟁의 폐허 위에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쉼 없이 달려왔다. 당시 부모 세대에게는 자녀를 충분히 돌볼 여유보다, 대가족이 굶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 더 시급한 과제였다. 생존이 삶의 최우선 가치였던 그 시절, 개인의 감정은 자연스레 뒤로 밀려났다.

이후 산업화와 새마을운동의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 '빨리빨리'의 속도, 21세기에 들어 디지털 문화와 끊임없는 비교와 실시간 평가가 일상이 되면서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 속에서 자신을 규정하게 되었다. 생산성만이 사회의 절대적 가치가 된 것이다.

그렇게 형성된 정서적 결핍은 세대를 거쳐 조용히 전이되었다. 소희는, 자신이 느낀 고통을 표현할 언어조차 갖기 어려웠을 것이다.






<소희, 다음 소희, 그다음 소희...>


소희는 왜 춤추는 것을 좋아했을까.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할 통로가 막힌 그녀에게 춤은 유일한 숨구멍이었을 것이다.

몸의 움직임으로 억눌린 감정을 풀어내며, 잠시나마 자신을 옥죄던 세계로부터 벗어나 진짜 자신의 호흡을 되찾으려 했던 것은 아닐까.

사람들과 어울려 춤추는 걸 좋아했던 소희가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한적한 저수지 근처의 매점이다. 그곳 매점에서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던 한 줄기 빛을 소희는 오래도록 바라본다. 그 빛처럼 다정한 어른의 다독임과 지지가 단 한 번이라도 그녀 곁에 있었다면, 소희는 다시 살아갈 용기를 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한 인간이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를 둘러싼 관계망 전체가 정서적 공명과 책임의 윤리를 품고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을 못 보고, 보여도 침묵하고, 자본만 따라가는 어른들로만 둘러싸인 체계라면, 다음 소희는 계속 생겨날 것이다.







형사 : 애초에 그런 데로 애들을 보내면 안 된다고. 그렇게 못하게 학교를 감시하는 거 그게 당신 책임이라고. 당신이 막을 수 있었잖아. 근데 왜 아무 말도 안 했어. 왜 보고만 있었냐고.


장학사 : 적당히 하십시다. 일개 지방 교육청 장학사가 뭔 힘이 있습니까. 그래서요. 이제 교육부 가시렵니까? 그 다음은요?


교육청에서 형사 유진이 장학사와 나눈 대화 中







< 브론펜브레너의 생태체계이론으로 본 ‘정인이 사건’ >


정인이 사건도 단일한 원인이 아니라 여러 층위의 문제적 구조가 맞물린 결과였다.

이 사건도 브론펜브레너의 생태체계이론으로 살펴볼 수 있다.


미시체계에서 정인이를 둘러싼 가장 가까운 환경은 가정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폭력의 현장이었다. 양부모의 학대는 신체적 상처뿐 아니라 정서적 파괴로 이어졌고, 어린이집 교사와 의사의 이상 신호는 무시되었다.


중간체계에서 가정–보육기관–입양기관–경찰 간의 연결이 끊어져 있었다. 교사의 신고에도 기관들은 각자의 영역에 머물렀고, 서로의 정보가 공유되지 않았다. 그 결과 정인은 구조의 손길을 받지 못한 채 다시 학대의 공간으로 돌아가야 했다.


외체계는 제도의 무력함을 드러냈다. 입양 후 사후관리 부재, 경찰의 형식적 대응, 아동보호 인력과 예산의 부족은 모두 아이의 생명에 직결된 문제였다. 제도는 존재했지만 작동하지 않았고, 수많은 구조의 기회는 행정 절차 속에서 사라졌다.


거시체계는 사회문화적 통념의 문제를 보여준다. ‘부모의 권리’를 우선시하는 가치, 체벌을 훈육으로 여기는 관습이 폭력을 은폐했다. 여기에 ‘남의 일에 끼어들지 말라’는 방관의 정서가 더해져, 정인은 철저히 고립되었다.


시간체계로 보면, 경제성장과 효율 중심의 사회 속에서 돌봄의 가치는 오랫동안 주변화되어 왔다. 그 결과, 돌봄은 여전히 사적 영역으로 남아 있으며, 사회적 책임의 구조는 미비하다.


정인이 사건도 우리 사회의 생태가 얼마나 돌봄과 공감에서 멀어졌는지를 보여준다. 환경은 때로 인간을 키우는 따뜻한 토양이 되지만, 때로는 인간을 파괴하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현상이나 사건의 표면만이 아니라, 그 이면의 구조적 층위를 볼 수 있는 ‘생태적 시선’을 길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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