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심리학 <버닝>

"나도 저 노을처럼 사라지고 싶다" / 실존적 공허

by 예심




요즘 길을 걷다 보면 큰 헤드셋을 낀 젊은이들을 자주 마주친다. 그 모습을 볼 때면 나 또한 한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음악이 흐르지 않으면 밀려오는 불안과 분노, 죄책감 같은 감정들을 견딜 수 없어, 볼륨을 끝까지 높여 음악 속으로 숨어버리던 때가 있었다.

누군가 말을 걸어도, 자동차 경적이 울려도 들리지 않던 시절. 귀가 먹먹해질 만큼 음악을 들었지만, 마음속 공허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귀를 막아버린 것처럼 마음까지 닫아버렸던 나는, 타인과 자기 자신에게조차 무감해져 갔다.

그렇게 '무목적'과 '무성과' 속에서 하루가 금세 사라지면, 허무가 밀려왔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하던, 그야말로 젊은 날의 전형적인 풍경이었다.




< 빅터 프랭클의 실존적 공허 — 무의미한 삶 >


빅터 프랭클은 인간이 살아갈 힘의 근원을 ‘의미 추구’에서 찾았다. 사람은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할 때, 그 빈틈을 쾌락과 자극, 중독적 행동으로 채우려 한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이 쇼핑, 폭식, 성형, 스마트폰 과몰입, 술·게임 등에 빠지는 이유 또한 본질적으로는 같다. 의미 결핍 때문이다.

사실 오늘의 삶은 의미를 찾기 어려운 구조 속에 놓여 있다. 가정에서는 정서적 기반이 쉽게 흔들리고, 학교에서는 경쟁이, 사회에서는 성과가 한 사람의 존재 가치를 결정한다. 이렇게 역할 수행에만 몰두하다 보면, “나는 왜 사는가?”라는 본질적 질문은 점점 멀어지고, 그 빈자리에는 실존적 공허만이 남는다.




〈 버닝— 의미를 잃고 떠도는 세 젊은이 >


영화 〈버닝〉은 실존적 공허 속에서 흔들리는 세 청년의 모습이 담겨있다. 그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공허를 메우려 하지만, 그 시도는 결국 자기 삶을 어둠으로 몰아간다.

세 청년은 서로 다른 환경과 성격을 지녔지만, 그들의 내면에는 공통된 결핍이 흐른다.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내 삶은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이 두 문장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오래 머물지만, 언어로 자리 잡지는 않는다. 그렇게 그들은 조금씩 균형을 잃어가며 파국을 맞이한다.




< 벤 — 세련된 외피 아래 감정이 죽어버린 인간 >


벤은 부유하고 세련되었지만, 내면은 놀랄 만큼 비어 있다 “울어본 기억이 없다” "우는 사람이 신기하다"라는 그의 말은 단순한 감정 억압이 아니라 감정 기능 자체의 결여를 보여준다. 사랑, 슬픔, 공감 같은 인간적 정서는 그에게 부담스럽고, 오히려 어리석은 것으로 여겨진다. 종수가 해미를 사랑한다고 고백했을 때 비웃는 그의 태도가 이를 잘 드러낸다.

정서적 무감각을 견디지 못한 벤은 쾌락과 자극을 통해 공허를 메운다. 파티, 살인 대상 물색을 위한 여행하기, 살인하기, 살해당한 이들의 소지품을 기념품처럼 모아두기...... 그에게 삶은 진지한 무언가가 아니라 오락일 뿐이다.

살인은 벤에게 일종의 쾌감이자 통제감이며, 처벌이 없었기에 그는 살인을 반복한다. 이는 어떤 행동의 결과가 보상으로 다가오면 그 행동을 반복한다는 조작적 조건화로 볼 수 있다.

또한 그의 살인은 자기혐오의 투사로 해석할 여지도 있다. 자기 내면의 무가치함을 타인에게 돌려버리고, 그들을 '태워야 할 쓸모없는 비닐하우스'로 비유하며 파괴한다. 심판자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무의미한 삶을 사는 자신을 향한 분노를 타인에게 옮겨놓는 것이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벤이 종수의 칼에 찔린 뒤 보이는 평화로운 표정은, 역설적이게도 혐오스러운 자신이 심판받았다는 '안도감'처럼 보인다.




< 종수 — 책임감 속에서 방향을 잃어버린 자기 상실 >


종수는 벤과 해미에게 없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바로 '책임감'이다.

그는 스스로를 먹이고 입히고, 가족이 벌인 문제를 떠안으며 꿋꿋이 살아낸다. 유흥을 찾아다니지도 않고,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을 성실히 따르려 한다.

그러나 그의 눈빛에는 넋이 없다. 지하철에서 창밖을 바라볼 때도, 해미 집에서 남산타워를 바라볼 때도 그의 눈동자는 텅 비어 있다. 왜일까?

종수는 자신의 내면을 돌보지 않는다. 욕구를 표현하지 않고, 서운함을 숨긴다. 해미가 벤과 함께 나타날 때도, 종수는 “난 너와 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다”라는 한 문장을 말하지 못한다. 식사가 끝난 후 해미가 벤의 차를 타고 가겠다고 했을 때도 낙담한 자신의 마음을 감춘다.

또한 종수는 자기 삶을 위한 시간도 쓰지 않는다. 경제적 생존만을 위해 움직이고, 자신의 재능과 개성을 찾는 데에는 무관심하다. 소설을 쓰고 싶다고 말하지만, 소재가 될만한 씨앗을 찾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삶이 수수께끼 같아서 못 쓰겠다는 그의 말은,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를 보지 않으려는 자기 회피에 가깝다.

의미 있는 일도, 의미 있는 대상도 없이 공허한 나날을 버텨오던 종수에게 해미라는 존재는‘누군가와 연결되었다는 감각’을 일깨웠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해미를 잃었을 때, 복수라는 기이한 책임감까지 떠안는다. 그 방식이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살인이었음에도 말이다.




< 해미 — 즉흥성과 허무 사이를 떠도는 >


해미는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종수와 재회한 날 종수에게 팬터마임을 보여주며 말한다.

“나는 내가 귤을 먹고 싶을 때 항상 귤을 먹을 수 있어. 귤이 진짜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러면 입에 침이 나오고 진짜 맛있어"

팬터마임은 실체 없는 동작을 실체처럼 보여주는 연극이다. 팬터마임을 배우고 있다는 그녀의 모습은, 실질적인 삶 대신 허상을 붙잡으며 스스로를 달래는 방식처럼 보인다.

해미는 장기적인 관점으로 목표를 세우고 성취하는 방식을 배우지 못했다. 게다가 경제관념도 희미하다. 하지만 해미에게는, 벤과 종수에게 없는 것이 있다. 자기 삶의 무의미를 감각하는 능력, 다시 말해 '허무'를 민감하게 감각하고 반응한다는 것이다.

해미는 종수에게 말한다.

“리틀 헝거는 그냥 배가 고픈 사람이고, 그레이트 헝거는 의미에 굶주린 사람이래. 우리가 왜 사는지,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런 것을 늘 알려고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진짜 배가 고픈 사람이라고 그레이트 헝거라고 부른데”

해미는 자신이 그레이트 헝거임을 알고 있다.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떠났던 아프리카에서 본 붉은 노을을 이야기하며 해미는 울먹인다. 어두워지며 노을이 사라지는데 눈물이 났다고. 나도 없던 것처럼 사라지고 싶다고. 해미의 말에는 감당하기 힘든 삶의 허무가 깃들어있다. 종수의 시골집 마당에서 대마초를 피운 뒤 춤을 추다가 노을을 보며 해미는 또 한 번 눈물을 흘린다. 잠시 존재하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노을이 자신 모습 같아서 슬펐을까. 아니면 쾌락 후에 밀려오는 허무가 힘겨웠는지도 모르겠다.

안타깝게도 해미에게는 정서적 지지자가 전혀 없었다. 가족도 그녀를 외면했고, 친구도 없었으며, 일자리는 오래 붙들지 못해 동료와의 관계도 희미했다.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즉흥적으로 흘러가는 삶은, 그녀가 서 있을 땅을 끝없이 흔들어놓았다.

그렇기 때문에 종수라는 존재는, 해미의 어둑한 방 안으로 잠시 들어오는 남산타워의 반사 빛처럼 삶에 잠시 비추는 따뜻한 빛이었다. 옷을 벗고 춤을 추는 해미, 신분이 확실하지 않는 남자를 만나는 해미를 유일하게 걱정해 주던 사람은 종수였다. 해미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인식했던 사람도 유일하게 종수였다.




< 실존적 공허를 느끼는 이들 >


영화 〈버닝〉의 세 청년은 모두 다른 모습으로 길을 잃었다.

정서가 죽어버린 벤, 책임감에 짓눌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종수, 허무와 충동 사이에서 흔들렸던 해미.

의미를 찾지 못하면 사람은 자극으로 도망치거나, 남이 부여한 역할에 갇히거나, 허무 속에서 방황하게 된다.

삶의 의미 발견은 거창한 곳에서 찾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감정, 욕구, 관계, 능력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순간에서 시작된다. 영화 속 세 청년은 그 감각을 회복하지 못한 채 무너졌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조용히 묻는다.

“무엇이 당신을 살게 하는가?”

이 질문을 외면하지 않는 순간부터, 삶의 의미는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다시 모습을 드러나기 시작할 것이다.




< 실존적 공허를 극복한 빅터 프랭클 >


사람들은 빅터 프랭클을 '의미치료자의 창시자'로 부른다. 그러나 그가 세운 이 이론은 책상에서 길어올린 산물은 아니다. 그가 의미의 힘을 발견한 곳은, 인간 정신이 가장 처절하게 무너지는 장소였다.

그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 갇혀 인간 존엄이 바닥을 치는 실존적 공허와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이름 대신 번호로 불렸고, 꿈이나 계획 같은 것은 사치였다. 굶주림과 폭력과 혹독한 추위가 반복되는 하루 속에서 그의 생존 의지는 점점 희미해져 갔다. 내일이라는 시간이 보장되지 않는 삶 속에서 감정은 마비되어 옆 사람이 죽어가도 동요되지 않았다. 참기 힘든 절망의 끝에서 프랭클은 자신이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작은 질문을 통해 공허의 바닥을 딛고 일어섰다.


1) 아내의 얼굴을 다시 떠올릴 수 있다는 것

프랭클은 얼어붙은 손을 비비며 문득 아내의 얼굴을 떠올렸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함께 있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아내가 살아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내 얼굴을 기억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마음은 따뜻해졌다. 현실의 잔혹함을 넘어서는 사랑의 이미지는 생사를 초월하는 위로였다.


2) 자신이 언젠가 써야 할 책

또 하나의 불씨는 '사명감'이었다. 그는 수용소에서 보고 겪은 일들을 기록해야 한다는 강렬한 책임을 느꼈다. 그것은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임을 확인시켜주었다. 이것은 빅터 프랭클만이 아니라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살아낸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의미를 발견하고 삶을 재구성한다.

'내가 겪은 고통이, 다른 사람에게 성장을 돕는 자원이 될 수 있다'라는 확신에서 자신의 역할과 방향을 발견하는 것이다.


프랭클은 말했다. '살아야 할 이유를 잃은 사람은 수용소에서 가장 빨리 죽어갔다'라고. 실존적 공허는 단순한 우울과 슬픔이 아니다. 삶 전체의 '왜'가 사라지는 멍한 포기감이다. 그 공허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삶을 다시 붙잡게 만드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종수씨는 너무 진지한 것 같아요. 즐기면서 살아야죠.

뼛속까지 느껴지는 베이스

벤의 대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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