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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은영 Apr 26. 2019

13. 몰입

김영하 작가의 '나는 용서한다' 강의 내용은 익히 알려져 있다. 처음에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의문스러웠다. 글을 쓰는 것 만으로 순간적 몰입이 가능할까 싶었던 것이다.

몇 년 전, 나는 한 백일장에 참가했었다. 성인부는 신분증 검사를 하고 강당에 들어 선 다음, 딱딱한 규칙들을 들은 후에 글을 쓰기 시작해야했다. 처음 해보는 경험에 잔뜩 긴장한 채 나는 쭈뼛거리며 앉아 있었다. 그리곤 시제를 듣고 한동안 멍하니 아이디어를 떠올리느라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신나게 글을 쓰고 있었기에 주위엔  숨소리와 연필 소리만 들렸다. 그에 반해 나는 초조해져 입술만 잘근잘근 씹어 댔었다.

마침내 심부름을 주제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나는 생전 처음 참으로 이상한 경험을 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단순히 딸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때 첫 심부름을 했던 이야기로 시작 했었다. 이야기가 순조롭게 흘러가길래, 기분이 들떠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이의 생기발랄한 뒷모습이 생생히 그려졌다. 내 손이 생각을 따라잡지 못하고 한 박자 늦게 움직여대는 것이 조금 거슬렸을 뿐, 모든 것이 음악처럼 흘러갔다. 

심부름으로 간 마트가 길 건너에 있어서 나는 한껏 걱정을 하며 창문 밖으로 목을 길게 빼고 아이를 기다렸었다. 빼꼼 내민 내 얼굴에 문득 우리 엄마 얼굴이 겹쳐졌다. 그러자 이야기는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엄마의 이야기로 순식간에 옮겨갔다. 수능 날, 추위에 발을 동동거리며 날 기다리던 엄마가, 버스가 설 때마다 목을 길게 뺐던 모습으로 이어진 것이다. 전혀 다른 이야기 두 개가 어느 순간, 흐르는 물처럼 매끄럽게 연결되고 있었다. 내가 아이를 기다리던 심정과 엄마가 날 기다리던 심정이 평행선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다시 아이를 기다리며 목을 뺀 내 모습으로 이야기가 옮겨갔고, 아이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자 나도 모르게 환하게 웃었던 게 번쩍 떠올랐다. 

바로 그때, 아이 편에 바짝 붙어 앉아 저 너머 평행선으로 달리던 엄마의 모습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버스가 도착할 때마다 발을 구르며 애를 태웠을 모습이 눈으로, 머리로, 가슴으로 아프게 파고 들었다. 

갑자기 눈물이 뚝 떨어졌다. 근엄한 분위기로 무겁게 가라앉은 강당에 앉아, 난데없이 눈물을 찍어내게 된 내가 스스로도 어이없고, 갑작스러워서 적잖히 당황했었다. 대회를 주관하시는 분들이 곳곳에 서 계셨는데, 흘깃흘깃 나를 보는 눈길이 느껴졌다. 그런데도 눈물은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힘들게 힘들게 마무리를 하고 자리를 일어나는데, 기분이 참 묘했다. 1시간 30분동안 공간이동이라도 한 것 같은 기분, 그저 영화같은 영상이 아니라, 그 현실 속에 분명히 들어갔다 온 기분이었다. 

그제야 '나는 용서한다'의 강의 내용을 뼈 속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글을 통한 몰입과 현실감, 그 속에서 나는 엄마와 나, 나와 딸의 관계를 생생하게 체험했다. 그 특별한 경험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 백일장에서 입상의 행운을 얻었다. 그리고 그 행운보다 더 의미있는 깨달음도 얻었다. 글을 써야하는 이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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