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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은영 Apr 29. 2019

16. 스피치

힘드냐?나도 힘들다.

회사에서 프리젠테이션 할 일이 많아지자 남편이 슬슬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알아보더니 어느 날, 진지하게 스피치 학원에 다니면 어떻겠냐 물었다. 적지 않은 학원비 때문에 못마땅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다 싶었다. 그 후 학원에 다니기 시작한 남편은 긴장되는 순간들을 즐기려 부단히 노력했다. 분명 부담스러운 시간이었을텐데 어떻게든 극복하려는 모습이 나름 대견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루는 딸 아이가 학교에서의 발표 스트레스를 토로했다. 그래서 남편이 학원 원장님께 어린이 반이 있는지 여쭤보았단다. 다행히 토요일 반이 있었고, 남편이 다니고 있으니 아이는 무료로 다니라 하셨다.  

토요일에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갔다. 몇 시간 후, 심드렁한 표정으로 돌아온 아이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투덜댔다. 하지만 남편은 참고 다니다보면 결국엔 나이질거라고 거듭 설득했다. 물론 아이 생각은 영 달랐다. 보기에도 아이는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 같았다. 발표 스트레스를 없애러 학원에 가서 또다른 스트레스를 안고 오다니, 참 이상한 해결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 토요일에 남편이 급한 일이 생겼다며 나더러 아이를 데리고 학원에 다녀오라 했다. 수업받는 동안 대기실이나 의자에 앉아서 아이를 기다리는 것이 뭐 어렵겠냐 싶어 가벼운 마음으로 아이랑 학원에 갔다.

원장님과 따님이 선생님이셨는데, 우렁찬 목소리가 지붕을 뚫지 않은 것이 이상한 정도였다. 함께 수업을 받는 남학생 2명과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난 대기실로 나가려 몸을 돌렸다. 그런데 원장님이 엄마도 함께 수업에 참여하라 하셨다. 난감한 표정의 내 얼굴을 딸 아이가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순간 아이만 등을 떠미는 모양새가 영 아니다 싶어 까짓 거 참여하기로 했다.

수업은 한 명씩 단상에 올라 큰 소리로 연설문 같은 것을 읽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단락 단락을 끊어 읽는 대목에선 자연스럽게 청중을 바라보아라, 목소리는 최대한 크게 유지하라는 등의 주문이 이어졌다.

한 명씩 돌아가며 단상에 올라 외치고, 그것도 모자라 주먹까지 들어 올리는 다소 부끄러운 일들이 이어질 참이었다. 예상대로 우리 아이 목소리는 기회만 있으면 목구멍으로 다시 기어들어 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머지 남학생 2명도 모르긴 몰라도 엄마들 등살에 떠밀려 온게 분명해 보였다.

이윽고 내 차례가 되었다. 흩어지는 정신을 긁어 모아도 내 속엔 같은 말만 반복되고 있었다. '여긴 어디? 난 누구?'
그런데 단상에 올라 딸 아이 얼굴을 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엄청난 사명이라도 가진 듯 아랫배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나도 모르게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최선을 다해 목소리를 높였다. 연신 딸 아이에게 '이렇게 하는 거야'라는 눈빛을 보내면서. 고함을 얼마나 질렀는지, 나중에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조금만 더 하라고 하면 끄억, 소리를 마지막으로 쓰러질 지경이었다.

기나 긴 수업이 끝나자 난  얼른 교실을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집에 오니 그야말로 녹초가 되었다.
벌러덩 드러누운 날 보고 아이가 싱글거리며 물었다.
"엄마도 스피치 수업 싫었지?"
그렇게 태연한 척 연기를 했는데도, 너무 티가 났나보다.
"응..."
이실직고 대답하니, 아이가 배를 잡고 웃었다. 자기만 싫었던 게 아니라서 천만 다행인 모양이었다.

며칠 후, 남편이 수업에 갔더니 원장님이 그러더란다.
"아내 분이 스피치에 아주 소질이 있어요. 혹시 이 쪽으로 나갈 생각 없으시대요?"
소질이라곤 눈꼽 만큼도 없는 내가 그저 '딸 아이의 의욕을 끌어내려는 일념 하나'로 소리를 있는대로 질렀다는 걸 진정 원장님은 눈치채지 못하셨던 걸까...

하여튼 그 후, 남학생들이 그만 두면서 자연스럽게 수업은 없어졌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딸 아이도 나도 행복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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