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필사했다. 그런 필사의 시간이 없었다면 내게 백석은 그저 하고 많은 시인 중의 하나로 남았을 것이다. 그가 내게 왔을 때, 나는 그의 시를 필사하면서 그를 붙잡았다." 안도현<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나의 매일 루틴 중 첫번째는 '아침 15분 필사하기'다. 사실 이전에 혼자 시도하다가 중단했던 게 여러번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필사 인증방에서 다른 멤버들과 함께 하고 있다. 규칙은 간단하다. 밤 11시 전까지 그 날 필사한 것을 사진으로 찍어 올리면 된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생기면 하루정도 휴가를 신청할 수 있지만, 별도의 신청 없이 미인증 2회 누적시, 스스로 나가야 한다. 나는 이런 강제성이 좋다.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한 채 스스로를 위해 할 일을 하면 되니까.
나는 동화 '채채의 그림자 정원'을 필사중이다. 이 책은 여러번 읽었는데도 좋아서 필사까지 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이향안 작가님의 책들이 주는 묵직함을 마음에 새기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필사는 왜 하는 것일까? 첫째, 나같은 경우에는 '모방-습작-창조로 이어지는 법칙'을 체득하기 위해서 하고 있다. 어린이 동화는 아주 단순한 것 같지만, 가끔씩 작가만의 맛깔스러운 표현이나 비유가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 표현을 만났을 때는 목이 간질간질해지고, 얼른 채집해두고 싶어 마음이 조급해진다. 이처럼 우연히 만난 표현들을 채집하는 것과는 별도로 필사로 천천히 채집하는 작업도 반드시 필요하다. 왜냐하면 느릴수록 머리에 새기기 좋고, 여러번 반복하는 효과를 기대할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모방은 단순히 베끼는 차원에서 시작하지만, 이를 자기화하면 습작으로 발전시킬 수 있고, 급기야 새로운 것의 씨앗이 되어 전혀 다른 것을 창조해내는 원천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흔히 모짜르트가 타고난 천재성 때문에 대단한 음악가가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고 한다. “사람들은 내가 쉽게 작곡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실수라네. 단언컨대 친구여, 나만큼 작곡에 많은 시간과 생각을 바치는 사람은 없을 걸세. 유명한 작곡가의 음악치고 내가 수십 번에 걸쳐 꼼꼼하게 연구하지 않은 작품은 하나도 없으니 말이야.” -모짜르트-
둘째, 필사를 하는 동안은 뇌도 마음도 편안하게 이완된다. 아침 6시에 알람이 울리면, 나는 피곤해도 몸을 일으킨다. 아침을 간단히 차려 가족과 식사를 하고 나면, 남편은 씻고, 아이는 아침 공부를 한다. 적당한 생활 소음이 흐르고, 아이가 영어책을 읽는 소리가 간간히 들리면, 나는 손의 움직임에 온전히 몰입해 동화 속으로 빠져든다. '채채의 그림자 정원'에서 채채가 심통이 나면, 나도 그 마음에 가 닿아 토라져보고, 할아버지가 조선왕조실록 이야기를 하면 그 이야기를 두런두런 듣고 있다. 머리를 비우고 그저 이야기에 집중하니 이보다 좋은 명상은 없는 듯 싶다.
셋째, 책을 새로운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채채의 그림자 정원'은 이미 여러번 읽었지만, 필사로 읽어보니 이전과는 달리 새롭게 이해되는 부분이 보인다. 단순히 인물을 이해하는 것 이상으로, 그들의 심리나 마음에 한층 다가가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필사는 책을 되새김질하는 과정이에요. 단순히 글자를 쓰는 데 끝나지 않고 통독을 하면서 옮겨 쓰는 것이기 때문에 책을 백번 읽는 것보다 한번 필사하며 읽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이죠."
-조정래-
나는 김시현 작가님의 <필사, 쓰는대로 인생이 된다>라는 책을 읽고 필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필사를 해야하는 당위성과 필사로 인생이 변화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었는데 꽤 인상깊게 읽었다. 물론 필사로 인생이 극적으로 변화하진 않겠지만, 나의 경험상 최소한 긍정적인 변화로 이어지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