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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명고래 루나 Feb 02. 2024

눈물의 바다

나는 눈물이다


가슴속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쳐 오른다. 감정의 소용돌이. 그것은 기어코 눈물샘을 자극해 어느새 눈동자는 촉촉해지고. 차오르고 차올라, 넘쳐흘러 빰을 타고 흐른다. 나는, 그 눈물이다.


나는 눈물을 제대로 흘리지 못한다. 적어도 최근의 나는 그렇다. 내가 그 눈물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보는 것이다. 대뇌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감정들의 아우성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 들은 단지 내 안에 가득 차, 내 안에서 뛰쳐나오지 못한 그것들이 나를 가득 채워 종국에는 내 자신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래, 나는 눈물이다. 내 존재가 눈물이 되어 버렸다. 고정된 형태가 없는 액체 상태의. 정형화에 실패한 채로 나는 흐른다, 흘러내린다. 형태를 잡지 못하고 흘러가 닿는 그곳의 모습대로 나는 잠시 형상화될 뿐이다. 기쁨 속에서는 기쁘게, 슬픔 속에서는 슬프게. 가끔은 한 구석에 혼자 찌그러진 채로 모여서, 불편하게. 뾰족한 가시를 숨긴 채, 예민하게. 나는 나를 바른 형태로, 원하는 형태로 멈추지 못한다. 붙잡고 있지 못한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흘러갈 뿐이다.


공황장애, 불안장애, 우울증, 강박. 네 가지를 진단받았다. 병원을 다니며 약을 먹었다. 부작용이 와서 그마저도 얼마 못 가 그만두었다. 세상의 기준과 이치에 의문을 품는다. 과연 삶에 정답이란 게 있는 것인가. 나에게 받아들이길, 강요 아닌 강요로 들이대는 위로라는 이름에 것들의 실체는 무엇인가. 누구를 위한 걱정인가. 누구의 불안에 기인한 것인가. 당신의 손안에 잡히지 않는 나를 향한 원망인 건가.


나는 그저 흐르는 대로 흘러갈 뿐이다. 당신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뿐이다.


 

그러한 나는, 눈물이다. 슬픔이 가득 들어차 결국 몸 바깥으로 빠져나와 버리고 마는. 그렇게 내 몸 안의 흐름에서 벗어나 버리고 마는. 더 이상 궤도 안에 머무를 수 없는. 이 사회가 규정해 놓은 ‘일반적인’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궤도에서 자의가 아닌 채로, 그렇다고 타의도 아닌 채로. 그것은 나의 의지와는 무관한 일이었으나, 그렇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당황스럽기도, 남에 옷을 입은 듯 어색하기도. 때론 아니라고 부정해 보기도 하며.


아이가 2학년이 되고 돌봄 교실을 신청했는데, 2학년 한부모 가정의 우선순위는 꼴찌였다. 2학년 맞벌이 가정 다음의 순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는데. 뭐 이따위인가. 그래도 어쩌겠나, 쳐다보고 싶지도 않은 서류를 준비해서 학교에 신청서를 내고 났더니 일하고 있는 중에 전화가 왔다. ‘이렇게’ 서류를 내시면 맞벌이 가정보다 순위가 낮다_고 했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어디서 누군가를 구해와 맞벌이 증명이라도 하라는 건가…. 나중에 누군가가 문제 제기를 했는지 맞벌이 가정보다 선순위로 바뀌었다는 안내를 받았으나, 돌봄 교실은 1학년에서 마감되어 결국 입급하지 못하였다.


그날 나는, 그렇게 내가 ‘일반’의 궤도 밖으로 튕겨져 나왔음을, 영영 내 것이 아닐 것만 같은 그 단어의 집단에 내가 속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형체를 알 수 없는 원망과 분노를 꼭꼭 씹어 꿀꺽 삼켜버리기로, 덫에 걸린 사슴처럼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리며 원망을 품고 있지 않기로. 타인으로, 상황으로 인해 야기된 일에 자기 연민의 눈물 따위는 흘리지 않기로 다짐해 보면서.




하지만, 나는 눈물이다. 기쁨에 가득 차, 결국 해내고야 마는 자신을 향한 응원과 타인의 행복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세상에 대한 감동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세상 모든 에는 양면이 존재한다. 눈물엔, 슬픔만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나는 기쁨 가득 담긴 환희의 눈물이기도 하다. 내가 여기 이렇게 살아 있음에, 살아가고 있음에. 하늘은 파랗고,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함에, 매년 새로운 싹을 띄워내고야 마는 자연의 생명력에. 나의 하루를 이루고 있는 많은 일들 중 나를 향해 있는 모든 우호적인 것들에. 자신과는 무관한 타인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고 배려하여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감동적인 그 누군가들로 인해. 그리고, 나와 사랑하는 이를 닮은 나의 아이가 이 땅에 살아가고 있음에.


아무것도 없는 듯, 아무것도 아닌 듯 고요한 나의 세계에 유일하게 반짝이며 빛나는 존재. 나의 아이는 따뜻하고 친절하다. 사랑이 가득하고 타인을 배려할 줄 안다. 험한 말을 쓰지 않고, 부탁받은 일은 가능하면 도움을 주고, 비 오는 날 친구와 우산을 나누어 쓸 줄 알고, 친구의 기쁨을 진심으로 축하해 줄 줄 아는. 그렇게 아이는 나의 기쁨 그 자체이다.  


조금씩 짜증이 많아지고 엄마의 말에 반하는 자기주장을 하며 사진 찍자는 엄마를 피해 도망가지만, 그런 모습들을 보며 아이가 이 세계에 하나의 인격체로 성장하고 있구나 가슴이 벅차다. 아이의 성장만큼 나도 하루하루 성장하여, 언젠가 아이가 독립적인 존재로 내 품을 떠날 때, 한 걸음 옆에서 조용하고 단단하게  아이를 지지해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반짝이는 눈물이다. 빛을 받아 아름답게 반짝일 수 있는. 나 자신의 모습 그대로 살아갈 수 있는.


퇴사를 결심하였다. 가만히 있어도 불편한 삶을 내려놓기로 하였다. 인생을, 삶을 가볍게 살아가기로 한다. 누구도 알 수 없는 그 언젠가 나 역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무(無)의 세계로 돌아가야 함을. 그저 생에 던져진 채 왔다가 사라질 뿐인 존재임을 가슴에 새기며 미련도 아쉬움도 없이. 더 이상 세상의 기준으로 나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기로 한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을 충실히 살아 내는 것으로 최선을 다해 반짝이고자 한다.


 

그리하여 또 나는 눈물이다. 그 눈물 가득 모여 만들어진 눈물의 바다다. 깊이와 넓이를 가늠할 수 없는 그 광대함 안에서 결국은 생명을 품어내고야 마는. Pure 하진 않지만, 그 염분의 물질들을 모아 새로움을 탄생시켜 기어코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는.


나는 끊임없이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살아내기 위해서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 또 다른 삶들을 위해서.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했을 때, 그것이 완전한 끝이 아님을 알기까지 지극히 주관적인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래서 아직도 나는 그것을 알아가는 중이지만. 모든 끝은 또 다른 시작과 맞닿아 있기에 한쪽 문이 닫히면 반대쪽 문은 열린다는 것을 믿는다.


나는 오래전부터 삶의 이유에 대해 고민해 왔다. 사람은 왜 사는 것인가, 왜 살아야만 하는 것인가. 20대의 나는 이 질문을 숱하게 많이 던져댔고, 내가 찾은 내 삶의 이유는 ‘가치'였다. 내가 존재함으로 인해 이 세상에 미칠 수 있는 따뜻함. 나눌 수 있는 온기. 아주 약간의 도움. 소소한 관심과 친절. 그리하여 나에게로 가치로운 삶.


나는 알고 있다. 아니, 이 또한 믿는다. 흘려보내지 못한 슬픔과 가슴에 맺힌 아픔이 내 안에 가득 들어차 있지만, 까아만 밤보다 더 깊은 어둠에 잠겨 있는 어제의 나 또한 품어 내리란 것을. 그 언젠가 결국 바다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눈물이 모여 이룬 그 바다는 과거를 품어내고, 현재를 살아내며, 미래에 새로움을 탄생시키리 것을.


누구의 삶이 비극인지 희극인지는 눈 감는 순간까지 그 누구도 알 수 없기에, 다만 앞으로의 내 인생에 희극의 요소 하나쯤 더하며 살아가는 것은 충분히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라 믿기에.


내 눈물의 바다는 오늘도 희망을 품고 반짝인다.

나의 눈물이 모여 이룬 바다 안에서 나의 아이는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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