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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명고래 루나 Mar 01. 2024

울어도 될까요?

그날만큼은, 정말로 그랬다

거실에서 내다 보이는 마당은 서서히 어둠에 잠기고 있었다. 하늘은 간간히 비를 뿌렸고, 세찬 바람이 지나고 있었다. 마당 한 구석에 선 하귤 나무가 흔들리고, 하귤이 바닥으로 낙하하는 것을 우리는 함께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많이 울었다.


지난주, 겨울 방학 끝자락에 제주도로 여행을 다녀왔다. 4일째 되던 날, 광주에 살고 있는 아이의 고모가 연차를 쓰고 1박 2일의 짧은 일정으로 우리의 여행에 동행해 주었다. 많이 보고 싶던 터였다. 공항에서 아가씨를 픽업해 늦은 겨울일지 이른 봄일지 모를 유채꽃밭에 다녀왔다. 제주도의 남쪽으로 내려가는 렌터카 안에는 어른 여자 셋과 십 대 남자아이 하나가 온담 하게 타고 있었다. 나는 운전대를 잡고 있었고, 이 여행의 호스트인 잠실 아가씨는 조수석에 앉아 길치인 나와 내비게이션 사이를 통역해 주고 있었다. 광주 아가씨는 뒷 좌석에 아이와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떠나간 그에 대한 어떤 이야기 끝에 우리는 빵 터져 차가 흔들리도록 배꼽 잡고 웃으며 그 시간 안에서 함께 존재했다.

 노란 유채꽃이 펼쳐진 산방산 아래서 잠실 아가씨는 광주 아가씨에게 셋째는, 딸! 기운을 받으라며 외쳤고, 그 소리를 들은 아가씨는 기겁을 하며 아니, 로또 1등! 을 외쳤다. 그 모습을 보며 깔깔거렸지만 나는 무엇을 소원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 심정이었다.

 중문색달해변과 사계해변까지 둘러보고 장을 봐서 숙소로 돌아왔다. 참돔 회와 초밥, 레드향과 한라봉을 좌식 테이블에 세팅하고 쪼르르 둘러앉았다. 내가 고른 감귤 막걸리와 광주 아가씨가 고른 우도 땅콩 막걸리를 둘이서 나눠 마셨다. 밤이 무르익으며 우리가 나누기 시작한 이야기들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잠실 아가씨가  큰 소리로 게임을 함께 해 주며 아이의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는 형제 중 장남이다. 내게는 단 한 명의 시동생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시어머니께서는 1남 5녀 중 둘째 셔서 그에겐 사촌동생들이 많았다. 특히 잠실 아가씨는 내가 연애를 시작하던 20대 때부터 함께 해 온 인연이었다. 광주 아가씨는 나보다 한 살이 많았고, 잠실 아가씨는 나보다 두 살 어렸다. 원래 잠실 아가씨와는 자주 어울리며 지냈는데 그가 떠난 후에는 부쩍 광주 아가씨와의 왕래도 잦아졌다. 광주 아가씨는 간호사인데, 그가 투병 중에 심리적으로 많이 의지 했던 동생이기도 했다.


맏며느리인 나는, 동서와 사이가 좋지 못했다. 어디서부터 꼬여버린 건지 이제는 설명하기 조차 힘이 든다. 날카롭고 뾰족 거리는 마음을 가까이 맞대고 있었을 때는 그저 동서가 싫었는데. 거리를 두고 나니 그 아이도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고 네가 잘못한 만큼 나 역시 잘못한 게 있었기에 우리가 그렇게 삐걱대고 부딪혔던 게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잃은 후 동서를 마주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매번 제멋대로인 행동으로 나를 힘들게 하고 공격적인 말들을 자각 없이 함부로 내뱉는 그 아이를 단 한 번도 가족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기에 미련도 없었다. 내 손에 억지로 쥐어진 것 이외의 고통이나 아픔을 자의로 내 앞에 들이밀고 싶지 않았다. 내 편 하나 없는 상태로, 나를 보호해 줄 울타리 없는 상태로 갈가리 찢겨 너덜너덜해질 내 모습이 눈에 선한 그 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동서 하나를 멀리하기 위해 시댁과도 점점 멀어져 갔다. 나의 선택이었고, 지금도 후회는 없다. 그로 인한 시어머니의 한숨과 원망은 온전히 내 몫이 되었지만 말이다.


곁에서 지켜보던 아가씨와 이모님들은 직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쉽게 개입할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사이가 좋았던 나와 시어머니의 관계가, 나와 시댁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을 다른 가족들은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으나, 아니 최소한 상황을 이해라도 해 보려 했으나 무엇하나 그들에겐 쉽지 않은 일이었으리라.

가족들에게조차 집안일 이야기는 극도로 꺼리는 시어머니임을 알기에, 가까이에서 함께 모든 걸 겪으며 지내온 잠실 아가씨는 그렇다 쳐도 광주 아가씨에게는 시시콜콜 이야기하지 않기 위해 매번 마음을 굳게 먹어야만 했다. 그랬는데… 나는 제주라는 장소의 설렘 때문이었는지, 감귤 막걸리의 달콤함 때문이었는지, 혹은 오랜만에 온몸에 과다 흡수된 알코올 때문이었는지. 그토록 뒤편으로 숨겨보려 했던 상처를 아가씨 앞에서 풀어헤치고 말았다.


낮게 부딪힌 막걸리잔 속에서 노랗고 뽀얀 막걸리가 출렁였다. 얼굴 가까이로 가져대자 상큼한 귤향이 코 끝에 감겼다. 한 모금 머금은 뒤 천천히 삼켜내고 나자 아가씨는 입을 달싹였다. 작은 새언니와는 뭐가 안 맞는 거냐_는 질문에 나는 어색한 웃음만 지었다. 아직 며느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이상 집안의 수치를 굳이 내 입으로 말한다는 건 누워서 침 뱉기가 아니겠는가, 싶었다. 아가씨는 짧은 침묵 끝에 ‘하긴, 뭐… 따로 연락하는 것도 아니지만, 나랑도 잘 맞지는 않아요.’라고 말했다.

광주 아가씨와의 관계는, 나 역시 그가 떠나기 전에는 많아야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아주 가끔 명절 인사나 안부 인사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내가 동서를 멀리하고 광주 아가씨를 가까이하는 사이, 내 의도와는 무관하게 시댁과 아가씨와의 사이에 균열을 생기기 시작했다. 모든 상황과 이유를 차치하고 나는 그 균열의 시발점이 나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가씨들과의 인연도 여기서 정리해야 옳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오랜만에 이모를 뵙기 위해 올라온다고 연락을 드린 날, 그녀의 둘째 이모이자 나의 시어머니께서는 생전 안 하던 이야기를 하셨다고 했다. 작은 새언니, 그러니까 동서에게 올라온다고 따로 연락을 하라 했다 한다. 이미 당신 집안의 담장 밖으로 뛰쳐나온 나보다 당신 품 안에 남은 둘째 며느리를 챙기기로 마음먹으신 거였을까. 아니면 그러한 내가 당신의 조카들과는 어울리는 게 못 마땅하셨던 마음에 동서의 입지를 세워주기로 마음먹으신 걸까. 시어머니는 그녀를 마주했을 때, “네가 생각해도 쟤(동서)가 잘못했냐?”라고 물으셨다고 한다. 나는 듣고 있던 그 자리에서 앉은 채로 까무러칠 뻔했다. 며느리들이 광주 아가씨를 마주하는 건 많아야 일 년에 한두 번이다. 그런데 저런 질문을 하셨다는 건, 내가 당신 집안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그녀에게 전했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절차인 것 같았다. 양팔 위로 오소소 소름이 돋으며 존재감 없던 잔털들이 바짝 몸을 세웠다.


그래, 그래서 더욱.


나는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았던 거다. 어쨌거나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객관성을 잃은 사실일 테니까. 내가 뭐라 했다고 한들, 나를 향한 원망은 여전했을 테니까. 그래도, 그럼에도. 나는 그날만큼은 동서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다음 질문에 대답을 했다.  


“배려…라고 생각하려 했지만…. 배제된 것 같다고. 느껴졌던 것 같아요..”


그날 터져 나온 건, 시어머니와 시동생에 대한 원망이었다.


‘배제’라는 단어가 내 입에서 나오자 아가씨는 안색을 바꾸고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대변하듯 화를 내주었다. 내내 언니가 많이 서운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며. 그 한마디에, 제대로 치료하지도 못하고 대충 붕대로 둘둘 감아 꼭꼭 숨겨둔 상처받은 마음에서 대책 없이 진물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성은 분명,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반드시 후회할 것임을 경고했다. 더 이상은 말하지 않는 게, 선을 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알람이 시끄럽게 울려댔다. 하지만, 상처투성이로 쓰러져있는 내게 손을 내미는 따뜻한 온기를 뿌리치고 싶지가 않았다. 그날만큼은, 정말로 그랬다.


나는 많이 울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엉엉. 하던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엉엉엉.


그가 떠난 후 나는 제대로 울지 못했다.

울면, 내가 정말로 그를 잃은 것을 인정하는 것 같아서.

울면, 나만 의지하고 있는 아이가 불안해할 것 같아서.

울면, 내가 숨겨둔 상처에서 끝없는 출혈이 일어나 나의 존재가 소멸하게 될 것 같아서.


퇴사 후에는 아이가 학교에 간 후 혼자 울 수 있는 시간이 있었음에도 오래 참아온 나는 도저히 울지 못했다. 어떤 날은 실컷 울어버리고 나면 가슴속에 박혀 있는 대못 하나정도는 뽑혀 나갈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울 수가 없었다. 지금 내가 두 발 딛고 서 있는 이 바닥이 모래성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눈물이, 나의 모든 것을 무너뜨릴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아이는 수많은 밤을 아빠를 그리며 내 품에서 울었지만, 나는 울지 못했다. 아가씨는 내가 선 바닥을 함께 받쳐 들고 잠시, 울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듯했다. 나도 울었고, 그녀도 울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티슈를 건네었다. 울고 있는 엄마를 동그래진 눈을 하고 쳐다보고 있었을 아이를, 나는 차마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린 채 아빠가 보고 싶어서 우는 거야,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날, 그리움보다는 슬픔에 잠긴 원망과 한으로 울어 냈던 것 같다. 고모들도 아이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다정하게 말을 걸어 주었지만, 아이는 어쩌면 그날 나의 감정을 오롯이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날, 잠자리에 누워 아이는 아빠가 보고 싶다며 한참을 울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가 아닌데 조금 더 조심했어야 했나, 아가씨에게 그런 이야기까지는 하지 말았어야 했나… 또다시 나는 과거의 시간들을 복기하며 짙은 후회에 휩싸인다.




유채꽃밭에서 거짓말처럼 개었던 제주날씨는, 다음날 비바람과 함께 돌변했다. 도두봉 전망대의 알록달록 예쁜 무지개 도로 위에서 우리는 뒤집어진 우산을 다시 접지도 못한 채 꺅꺅 거리며 커피숍으로 뛰어 들어가 비를 털어냈다. 저녁 6시 출발 예정이었던, 광주 아가씨가 탈 비행기는 1시간 넘게 연착되었다고 했다. 우리의 여행도 끝이 나고 있었고 겨울 방학도 끝이 나고 있었고, 나의 안식년도 끝이 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내 앞에 펼쳐진 길은 여전 안개에 가려 뿌옇고, 지금 내가 있는 곳은 강하게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하지만, 비바람을 피할 따뜻하고 아늑한 장소가 내게 허락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해 본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센 비바람에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의 출발이 지연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해 본다.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나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또 새로운 하루를, 살아낼 것이다.


나의 생을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존재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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