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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명고래 루나 Mar 08. 2024

공허를 깨닫게 되는 순간들

여기 이곳에 왜 당신은 없는가

아주 사소한 일상과 스치는 매 순간순간마다
나는 당신을 그린다.
여기. 이곳에. 왜. 당신은. 없는가.


눈을 뜨고 발치를 살핀다. 새벽의 여명조차 비쳐들지 않는 완전한 어둠을 확인하고도 몸을 일으킨다. 잠이 깬 지는 오래지만 부족한 수면 시간은 몸을 일으킬 힘조차 새로이 주지 못한다. 누운 채 뒤척이고 있자니 허리가 아파 그만 일어나기로 결심했을 뿐. 불면증이야 오래 이어져온 일인데도 부족한 잠은 깨어있는 시간 동안에 삶의 질을 쥐고 흔들기에, 매번 겪어도 그러려니 해 지지가 않는다. 잠이 깨는 순간부터, 하루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나는 이미 양손 가득 무겁게 피곤을 쥐고 있다. 도저히 충분한 휴식이, 필요한 에너지가 채워지지 않는다. 마치 그의 빈자리처럼.




상실을 이겨내는 슬픔에는 단계가 있다고 한다.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

물론 슬픔은 지극히도 개별적인 경험과 감정이어서 모든 사람이 동일한 단계를 겪을 수 없고, 순서가 바뀌거나 특정 단계가 여러 번 반복되거나, 아예 없거나, 어떤 단계에서 멈출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단계들은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걸까.


 미국의 정신과 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와 함께 슬픔의 5단계를 주장한 데이비드 케슬러는 본인의 아들을 잃는 충격을 겪고 6번째 단계인 ‘의미'를 찾게 되었다고 한다. 아직 그의 책을 읽어 보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미안한 이야기지만, 나는 그 단계들을 믿지 않는다. 책에서 하는 말을 편견 없이 읽고 받아들이는 편이지만 상실 앞에서는 그 무엇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상실을 버틸 수가 없어 책을 찾아 읽고 또 읽었다.

굳이 5단계에 퍼즐을 맞춰보자면, 나의 경우에는 부정, 약간의 분노, 깊은 타협, 심한 우울, 이 네 가지 단계가 동시에 나타났다. 나는 구획된 어떠한 기간을 거쳐 명확하게 단계를 넘나들지 않았다. 네 가지의 단계가 한 달 안에 뒤죽박죽, 며칠 동안 뒤죽박죽, 심지어 몇 시간 안에도. 하나 이상의 감정들이 들쑥날쑥한 상태로 나를 지배했다. 대부분 부정과 우울이 바닥에 두껍게 깔린 채 주로 타협이 오락가락하는 상태에서 가끔 분노가 추가된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나의 복잡하게 쌓이고 얽힌 감정과 혼란스러운 심리 상태가 단지 그 네 가지로 나눠질 뿐이었겠는가.

단어의 어감으로 보자면 1960년대 슬픔의 단계를 최초로 주장한 영국의 정신과 의사 존 볼비와 콜린 팍스의 ‘슬픔의 4단계’가 나에게는 더 와닿는다. 무감각과 충격 – 그리움과 갈망 – 해체와 절망 – 회복과 재구성.


내가 상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현실감각을 잃은 상태인 것만은 사실이겠지만. 나는 그가 계속 존재한다고 생각했지, 그의 죽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그를 잠시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떠나보냈을 뿐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게 그거 아니냐는, 말장난 같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겐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그 언젠가처럼 출장 중이라고, 여행 중이라고. 언제나처럼 돌아올 거라고, 곧 돌아올 거라고. 그 믿음은 어쩌면 내가 갈 거라고, 곧 내가 당신 곁으로 갈 거라고_ 에서 나온 믿음 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함께이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럴 리가 없는데. 그가 없는 현실은 내게 왜곡된 인지를 가져왔다. 나는, “아니야, 그는 죽지 않았어.”라는 부정보다는 그는 그저 잠시 자리를 비웠고 다시 곧 만날 거라는, 현실을 왜곡한 인지를 하고 있다 생각한다. 부정이 아닌, 왜곡. 그것 조차도 그저 나의 방어기제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현실을 부정하고 있지 않아.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야,라고….


그를 떠나보낸 후, 나는 생과 사의 영역을 오가는 일상을 살아왔지만. 생의 영역에 있을 때는 적어도 왜곡의 방어막을 치고서라도 바로 서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앞에 놓여지는 종이 한 장에 매번 나는 경계선까지 한 번에 밀려났으며, 누가 내게 차가운 물을 한 바가지 뿌린 양 정신이 번쩍 들며 홀딱 젖은 채 서 있는 듯한 비참함에 사로 잡혔다.




3월 4일 오후, 새 학기 첫 등교 후 아이가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에 현관문을 나서면서 우리는 선생님의 성별을 내기했다. 아이는 지난 2년간 남자 선생님 반에 배정되었다. 아이가 다니고 있는 초등학교는 남녀 교사 성비가 1:2인, 비교적 남자선생님이 많으신 학교다. 새로운 담임 선생님은 아이 학교에 첫 부임한 20대 젊은 여자 선생님이셨다. 나는 사실, 아이가 집 밖에서 좋은 남자 어른을 많이 마주하기를 바라는 편이다. 여자 어른만 있는 집에서 자라는 아이에게 성비의 불균형을 약간이나마 해소시켜 주고 싶은 마음이랄까. 어차피 부족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 누구도 아빠의 빈자리를 채워주지는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슬픔도 개별적인 것이지만, 존재 간의 사랑 역시 우주에서 유일무이한, 결코 동일하게 대체될 수는 없는 것이니까.


아이의 가방을 열고 학교에서 보내온 종이 뭉치를 꺼내든다. 동의서, 확인서, … 이런저런 것들 속에 언제나 있는 ‘학생기초조사서’. 가족상황란에 관계는 ‘부’와 ‘모'로 나누어져 있다. ‘부’의 공백을, 오래, 바라본다. 부모의 성명과 주민등록상 생년월일 기재란 바로 아래에는 *생활기록부 기록예정이오니 정확히 기입해 주세요-라고 쓰여 있다. 거짓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진실을 쓰는 내 손은 언제나 덜덜 떨린다. 첫 해에 어떻게 써야 할까 오래 고민한 끝에 매년 이렇게 쓰고 있다. 올해도 볼펜을 꼭 잡고 크게 심호흡을 한 후, 써내려 간다.


부 / 성명 : 이 ㅇ ㅇ

생년월일 : 1978.11.13~2020.05.14(사망)


그리고 기타 사항에 매번 같은 당부를 써 내려간다. ‘부디, 수업 중에 아이가 아빠의 빈자리를 너무 크게 느끼지 않도록 배려를 부탁드린다’고. 세상은 너무도 무심히 가족신문을 만들게 하고, 아빠 캠프를 하며, 아빠의 직업을 발표하게 했으며, 아이들로 하여금 부모에게 편지를 쓰게 했다.


작년에 공개수업을 참관했는데, “사랑하는 엄마 아빠에게"로 시작하는 여자 아이들의 달콤한 편지 낭독을 듣고 있는 동안 내 심장은 불안으로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우리 아이는 뭐라고 썼을까, 하늘에 계신 아빠에게라고 썼을까? 엄마한테만 썼다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다른 친구들이 아빠에 대해 사랑을 표현하고 고마워하는 편지글을 들으며 내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두근두근두근….

드디어 차례가 되었을 때, 아이는 “엄마께"로 시작되는 편지를 읽어 주었다. ‘사랑하는’이라는 그 흔한 형용사도 하나 없는 담백한 편지였다. 열심히 공부할 생각 따위 1도 없으면서 ‘앞으로도 열심히 공부하는 어린이가 되도록 하겠습니다!’라는 마지막 문장까지 쉬지 않고 바람같이 읽어 내고는 앉아 버렸다. 세상 거짓말 같은 그 문장에서 긴장에 끈이 풀어졌다. 그래, 뭐. 아이에게 품은 응원의 마음과는 별개로 내 마음은 여전히 아팠지만 말이다. 부끄럽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다른 엄마, 아빠 앞에서 아이가 아빠의 부재를 발언하는 순간 급격히 초라해져 버릴 내가 걱정되었던 것 같다.


학생기초조사서는 매년 내가 그 서류를 언제 받게 될 것인지 알고, 그 양식을 이미 알고 있고, 혼자서 작성한다는 점에서 이제는 그렇게 충격스럽지는 않다. 하지만, 공허를 깨닫게 되는 순간들은 대게 예고 없이 찾아온다.


아이가 농구를 배우기 시작하던 날, 가입신청서에는 부모 각각의 이름과 연락처를 쓰는 란이 있었다. 아무런 마음에 준비도 없이 내 앞에 놓여진 종이 한 장을 들고 나는 짧지만 깊은 고민에 빠졌다. 정 그게 그렇게 마음이 쓰이면 학원 서류 정도는 가짜로 써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가도 나의 결론은 언제나 같았다. 공란.

그래, 쓸 수는 있다. 아이 아빠가 이름이 없냐, 형체가 없을 뿐이지. 하지만 핸드폰 번호는 아이가 아빠 것을 그대로 받았다. 쓸 수 있는 번호가 없었다. 대충 다른 가족의 번호를 쓸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에 끝까지 숨길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언젠가 아이 아빠의 부재를 누군가가 알게 되었을 때, 부의 란을 채워 넣은 나의 행위가 거짓이거나 기만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차마 받아들이지 못한 공허를 그저 공백으로.




올해는 문득, 이혼하신 분들은 이 빌어먹을 조사서를 어떻게 쓰고 계신지 궁금해졌다. 매년 등본을 제출하는 것도 아니니 그냥 써넣어도 모를 일이고, 사실 거짓도 아니지 않은가. 아니, 안 쓰고 비워두는 게 더 이상한 건가….


내가 국민학생이던 시절엔 부모의 최종 학력이나 살고 있는 집이 자가인지 전세인지 뭐, 그러한 것들을 조사했던 걸로 기억한다. 시간이 지나며 언제 그러한 것들이 사라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부"와 “모"로 나뉘어 있는 이 ‘조사서'라는 이름의 잔인함이 그 언젠가는 사라지기를. 아이가 학생의 신분으로 있는 동안, 내가 아이의 보호자로 존재하는 시간 안에는 사라져 주기를 바라보며. 오늘도 학생기초조사서는 모든 서류의 제일 뒷장에 배치하고 클립을 찾아 고정시켜 아이의 가방 안에 넣어 둔다.


믿는다. 믿고 싶다. 반복적으로 같은 생채기가 난 내 마음에, 채 아물기도 전에 계속 가해지는 상처에도. 언젠가는 딱지가 앉고 단단하게 회복되어 더 이상 같은 상처에 아파하지 않을 수 있기를.


올해도 나는 같은 종이 한 장을 앞에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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