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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명고래 루나 Mar 22. 2024

슬픔 속으로 들어가는 일

내 슬픔에 쌓여 있는 이자는 얼마만큼 일까

치료가 목적인 의료모델이라면 질병과 싸워 이기는 것이 이론적으로 가능하지만, 사별의 슬픔은 그럴 수가 없다. 고통을 피하려는 인간 본능과 정반대로 사별의 슬픔을 치유하려면 고통으로부터 달아나지 않고 고통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별에 뒤따르는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그것도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다.
 
사별의 슬픔이란 짧게 여러 번 찾아오는 것도 아니며 완전히 잊고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모순된 현실에 맞춰 살아갈 방도를 찾아야 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살 길을 찾아야 한다.

 다시는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예전처럼 관계를 지속하고 있는 듯 느낀다. 이 사실을 부정하거나 인지하지 못하면 점점 미쳐가는 느낌이 들것이다. 하지만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면 고통이 완화된다. 고인을 ‘보내주면서도 붙잡아두는' 역설적 상황에 놓여있음을 깨닫고 살아가야 한다.

사람들은 사별자가 슬픔을 굳세고 꿋꿋하게 이겨내면 칭찬하고 그러지 못하면 우려한다. 실상은 정반대다. 다들 사별자가 너무 슬퍼할까 봐 걱정하지만 충분히 슬퍼하지 않으면 슬픔을 끝낼 수 없다. 슬픔을 통해서만 사별의 고통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내게 알려준 것들], 줄리아 새뮤얼




오랜만에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버튼을 눌렀다. 최고 기온이 10도를 넘어 가지만 바닷가 마을의 바람은 드세고 여전히 나는 춥다. 히트텍 위로 든든히 옷을 껴입고 패딩점퍼의 모자까지 뒤집어써 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왼쪽으로 모퉁이를 돌자 뽀얀 먼지를 두껍게 뒤집어쓰고 몸을 웅크린 채 겨울을 나고 있는 차가 보인다. 몸을 집어넣은 후 들고 있던 짐을 조수석에 내려놓고 잔뜩 긴장한 채 시동 버튼을 누른다. 웬만한 거리는 그냥 걸어 다니고 장거리 운전은 싫어하기 때문에 겨울 동안 시동만 켰다 하면 배터리 경고 알람이 떴다. 큰맘 먹고 강원도로 2박 3일 여행을 계획했는데 대설 주의보가 내려 모두 취소해야만 했다. 짧은 거리라도 일부러 차를 몇 번 운행했더니 다행히 알람은 뜨지 않는다. 잠시 기다렸다가 천천히 차를 출발시킨다. 열선시트가 작동하지 않는 걸 보니 이제 정말 따뜻해지고 있나 보다.


주차장 밖으로 벗어나는 순간 나는 언제나 기분이 묘하다. 매번 똑같은 좁고 어두컴컴한 길을 지나 땅 위로 올라가면, 어떤 날은 화창한 날씨에 눈부신 햇살이 들이치고, 어떤 날은 곧 비라도 쏟아질 듯 먹구름이 가득하고, 어떤 날은 안개가 자욱하고, 어떤 날은 하얀 눈이 폴폴… 그 장면 장면들이 기억에 남아 있다. 매일 똑같은 출근길이었지만, 그 풍경만큼은 매번 달라서 내가 새로운 하루를 또 시작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했다. 주차장을 벗어나 출근하던 길을 그대로 다시 밟아 간다. 출근하던 나를 언제나 충동에 휩싸이게 했던 그 고가도로 앞에서 나는 좌회전을 하지 않고 그대로 고가로 차를 올린다. 짜릿한 쾌감을 느낀다. 바다가 보인다. 그가 잠들어 있는 그 바다가. 순간, 내 안에서 울컥 무언가가 올라오더니 순식간에 시야가 흐려졌다. 당황스러웠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혼자 가는 길이던 아이와 함께 가는 길이던 가족들과 같이 가는 길이던. 그를 만나러 가는 길에 울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아니, 언제라도 울지 못했다. 정말이지 울고 싶었지만 울 수 없었던 시간들을 지나오면서 나는 울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제주에서의 울음이 나에게 물꼬를 터 준 것만 같았다. 지난 몇 년간 내 다이어리에 쓰여 있는 새해 계획에는 ‘실컷 울기’가 항상 있었다. 목표로 하는 몸무게를 위한 ‘다이어트’나 ‘영어공부하기’ 만큼이나 제대로 실행력이 뒷받침되지 않던 계획이었다. 매년 실패하고 다음 해 새해 계획으로 매번 다시 써 두었던 ‘울기’.


자리를 잡고 가져간 술과 과자를 꺼냈다. 혼자서 조용히 그를 찾은 것은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그에 대한 생각을 하다 보면 현실감이 제로가 되는 경우가 있다. 그에게 막 말을 걸다가도, 어머, 이 사람이 어디 갔지? 하는 생각이 들며 왠지 멍 해지는 순간. 그러다 갑자기, 없다고? 이 세상에 없다고? 하며 혼자 묻다가. 그게 어떤 의미일까를 다시금 찬찬히 생각해 보아야만 하는. 그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고, 그의 행동이 찬찬히 그려지고,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하고.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건 깊고 푸른 바다뿐, 귓가를 스치는 건 세찬 바람소리뿐. 춥지는 않을까… 걱정해 보는 걸로 접어야 하는 망상.


 속으로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가 좋아했던 노래를 나지막이 부르고 있자니 다시 또 눈물이 흘렀다. 핸드폰으로 그 노래를 찾아서 틀어놓고 울면서 따라 불렀다. 모자가 달려 있는 옷을 입고 나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본다. 바람이 강해서 생각보다 더 추웠다.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운전하면서 도로 옆 자전거 도로를 달리는 사람들을 힐끗 거린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달렸던 그를 찾아 두리번거려본다.




슬픔은 대출금 같은 것이다. 애써 모른 척, 괜찮은 척해봐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자꾸 외면하거나 도망치기만 하면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 난다. 그저 실컷 슬퍼하는 것으로 착실히 상환해 나갈 수밖에 없다.


[아무튼, 여름], 김신회


 

내 슬픔에 쌓여 있는 이자는 얼마만큼 일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원금을 넘어서기 시작한 것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사별의 슬픔은 완료형이 아니라 평생 진행형이라는데 그렇다면 나는 눈을 감는 순간에서야 이 대출에서 벗어날 수 있으려나보다. 자못 긴 동행이 될 것 같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상환해 가야 하지 않을까. 가능하다면 원리금균등상환 방식으로 나의 슬픔을 갚아나가고 싶다. 시간이 쌓이는 만큼 내 노력의 결과도 조금씩은 느낄 수 있게.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모래성을 이제는 온전히 해체시켜, 반짝이는 순수한 알알이의 모래로 만들고 싶다. 그 모래는 봄바람에 흔들리고 파도에 의탁하며, 이리저리 나뒹굴고 부서졌으면 좋겠다. 나의 생을 향한 의지로 인해 풍화되고 눈물에 씻겨 닳고 닳아 곱디고운 흙으로 변했으면 싶다. 흙으로 되어진 새로운 바닥은 눈물의 비를 맞아 더 단단하게 굳어져 나의 삶을 굳건하게 버텨낼 수 있다면 좋겠다.


올해, 나는 나의 슬픔 속으로 온전히 들어갈 수 있을까?

잘 모르겠지만, 해보는 수밖에.

슬픔 속으로 들어가 나의 아픔과 고통과 상실을 마주해 보는 수밖에.


마주 앉아 술잔을 부딪힐 수 있다면 좋겠다, 꿈에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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