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 생각해 보면 지나온 내 인생의 모든 찬란하고 반짝이던 순간은 언제나 그와 함께였다.
대단하거나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젊음 그 하나로,우리에게 가득했던 열정 하나로 충분히 반짝이던 시절들. 아직도 내 안에서 보석처럼 빛나고 있는 그 시간들과 그 시절의 꿈들 말이다….
지금까지 그와 함께 만들어 온 내 인생이었다. 그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와 꿈꾸었던 우리의 미래는 아주 길었고 구체적이었고 행복했다. 그런데.
아직 숨을 다하지 못한 사랑이, 꿈이,
덩그러니 홀로 남았다.
삼 일전, 독일에 살고 있는 이종사촌 여동생이 가족들과 함께 입국하였다. 무려 꼬맹이 아들 셋을 이끌고. 제부는 그와는 부서가 다른 직장 동료이자 사내 78년생 모임 절친이었다. 우리의 결혼식 사진 왼쪽 무리에는 제부가, 오른쪽 무리에는 동생이 있었다. 결혼식에서는 서로 눈길 한번 나누지 않았던 그들이 우리 아이 돌잔치에서의 재회가 시발점이 되어 결국 결혼까지 하였다. 결혼하고 몇 년 되지 않아 제부는 동생과 함께 독일로 떠났다. 자주 함께 어울렸던 우리는 그들의 부재가 많이 아쉽고, 허전할 수밖에 없었다.
2020년 5월, 코로나가 한창 세상을 뒤집고 있을 때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그의 소식을 듣고도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오지 못한 분들이 제법 많았다. 동생이 셋째를 출산 한 지 며칠 지나지 않는 날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제부 혼자라도 한국으로 들어오려고 비행기 표를 구하고 입국 절차와 필요한 서류를 알아보고 했지만, 결국은 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땐 누구라도 그랬다.
그 사이 코로나는 우리 일상에얕고 넓게 스며들어 갔지만, 아이들 셋을 키우며 바삐 사느라 한국까지 발걸음 하지는 못했었다. 그랬던 그들이 드디어 다시 한국땅을 밟았다. 화요일에 도착해 바로 시댁으로 간 다음 수요일에 만나는 일정으로 약속을 잡았다. 오전에는 독일에서 태어난 셋째의 출생신고를 하러 동사무소에 들렸다가 바로 우리 집으로 오겠다 했다. 주차장에서 기웃 거리며 그들이 탄 차를 기다리고 있던 나는 5년 만의 재회에 깊은 포옹을 나누고, 조카들의 얼굴을 하나씩 살폈다. 얼굴도 못 보고 훌쩍 커버린 아이들의 모습은 다행히 사진과 똑같아 어색함보다 반가운 마음만 들었다. 급히 인사만 나누고 우리는 다시 출발해 그에게로 갔다. 나는 언제나처럼 챙겨간 소주 한 병과 아이가 만든 푸른 유리잔, 그가 좋아했던 김부각과 견과류를 간단히 휴대용 테이블 위에 차렸다. 동생이 부스럭 거리며 핸드백을 뒤지더니 그가 생전에 좋아했던 Bifi(살라미)와 캔디를 꺼내우리 형부가 좋아하던 거, 라며 상 위에 올려놓았다. 시리도록 푸른 잔을 제부가 가득 채웠다. 그리고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더러운 길바닥도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그의 이름을 부르며 바다를 향해 두 번 절을 하였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 밀고 올라온 감정은 슬픔이기도 했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한 고마움이자 감동이기도 했다.
함께 밥을 먹고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며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가 떠나기 이틀 전에도 메신저로 연락을 했는데, 정말 그렇게 갑자기 떠날 줄은 몰랐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 그날을 되돌려 기억해 내 이야기해 주었다.
그들은 작정하고 온 듯 나에게 독일로 함께 가자고 말을 꺼냈다. 독일어를 못해도, 한국어와 영어만으로 일자리가 많다고 했다. 오기만 하면 다 도와주겠다고, 걱정 말라고. 아무런 준비 없이 오는 한국인도 많다고 했다.
나는, 그가 있었다면 나는, 아프리카에 가서 살자고 해도 살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아직은, 그 어디에도 갈 수가 없다고 대답했다. 사실 우리는 그의 또 다른 고향인 태국에 가서 살 계획이 있었다. 아이를 그가 졸업한 국제학교에 보내고 싶어 입학 상담도 받았고, 우리가 태국에서 어떤 일을 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 오랜 시간을 들여 고민해 왔다. 하지만 매번 기회가 닿을 때마다 시어머니와 시동생의 결사반대로 우리는 몇 번이나 주저앉아야 했다. 어머님께서는 내가 죽거든 가거라, 하시며 내가 아이의 영어공부에 욕심이 있어 그런 줄로 오해하시고는 한국의 영어 교육 열풍을 못마땅해하시곤 했다. 아무리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해 보아도 소용없었다. 우리의 목적은 그런 게 아니었기에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행복한 곳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다. 한국에서는 입이 짧은 그가 태국만 가면 두세 배의 식사량을 보였고, 태국에서라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행복해했다. 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는 순간부터 그가 얼마나 들떠있고, 행복에 차 있는지. 나는 그의 그 행복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고 계속 방법을 찾고 있던 중이었는데… 그 와중에 그는 홀연히 떠나 버렸다.
그와의 모든 기억이, 추억이, 지울 수 없는 낙인처럼 깊게 각인되어 있는 한국을, 동네를, 집을. 혼자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혼자라도 아이를 데리고 떠날 생각을 했다. 태국이어도 좋았고, 독일이어도 상관없었다. 엄마가 계신 제주로라도 떠나고 싶었다. 회사를 퇴사할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마음먹었었다. 나는 떠나야만 했다. 이승을 떠날 수 없다면, 이곳이라도 떠나야 살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생에 발목을 잡은 것도 내 아이였고, 이곳에 발목을 잡은 것도 내 아이였다. 아이는 나와는 달랐다. 아빠와의 추억이 가득한 이 집을, 우리 동네를, 한국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아이를 설득해 보기 위해 이런저런 방법을 써 보았지만 아이는 완강했다. 이야기가 길어지면 여지없이 엉엉 울면서 자신은 아빠와 함께였던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언제나 나의 패배로 끝나는 대화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우리는 여전히 이곳에 남아있다.
아직도 나는 ‘떠남’에 대해 포기하지 않았기에 가끔 끈질기게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지만, 이제 아이는 또 다른 이유로 떠나기를 거부하고 있다. 자신은 한국어를 말하며 살고 싶고, 한국어로 공부하는 학교에 다니고 싶단다. 함께 자라온 친구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단다. 그 마음도 충분히 이해한다. 그래서 아이를 키우는 동안은 아이가 원하는 대로 이곳에 머무르게 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아이가 어느 정도 자란 후에는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살아갈 곳을 찾아 어느 날 훌쩍, 이곳을 떠나게 될지도.
동생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나에게는 또 다른 이종사촌인 그녀의 친오빠에게서 연락이 왔다. 우리 집안에서는 유일무이한 득녀 소식이었다. 이름은 ‘한나’로 지었다고 했다. 동생은, 당장 독일에 와서 살지 않더라도 한번 오라고 계속 졸라댔다. 영국에 너무나 보고 싶은 분이 계시고, 갓 태어난 한나 조카도 보러 가고 싶으니 한번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하는 걸로 입을 닫았다. 나는 올해 재취업을 목표로 하고 있고, 우리 집에 살고 계신 겁 많은 고양이를 케어하는 문제도 있어 독일까지 가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지만, 앞에 앉아 언니가 오면 다 같이 어디로 여행을 갈까 뭘 할까 하며 종알대는 동생을 보고 있자니 기분만은 좋았다. 그래, 재취업도 쉬운 일이 아니다… 뭐가 더 어려운 일일까, 내가 행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점점 가까운 미래의 작은 일들도, 확신할 수도 계획할 수도 없게 되어 버렸다… 나는 앞으로 어디에서 어떤 인생을 살아가게 될까, 살아가야 할까.
그가 스물일곱, 내가 스물셋이던 시절부터 우리가 함께 키워 온 그 아름답고 반짝이던 시절의 꿈들을 나는 계속 가슴에 소중히 품을 것이다. 그 빛으로, 그 힘으로 어디에서든 어떻게든 살아갈 것이다. 그의 몫까지 잘 살아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