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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명고래 루나 Feb 23. 2024

엄마라는 이름값, 나라는 존재의 목숨값

산다는 것을 불안정하게나마 갈망하기 시작했다.

우울은, 과거의 어느 점을 복기하는 순간 후회와 함께 즉각적으로 밀고 들어왔다. 십 년 전의 일이기도, 며칠 전의 일이기도, 바로 오늘 아침의 일이기도 했다. 불편한 순간들에 대한 기억은 그 무엇보다 또렷하게 내 안에 각인되어 여기저기 뻗친 촉수 끝에 살짝 닿기만 해도 사전예고 없이 자동재상 되어 일상을 헤집어 버리고 말았다. 생각을 그만 멈추고 싶다고 소리쳐 보아도 우울의 구덩이에 한 발 잘못 들이민 순간에는 그 무엇도 전달되지도, 통제되지도 않았다. 후회는 종래엔 반드시 나 자신에 대한 경멸과 자책을 진하게 남겼고 우울은 꼬리를 길게 늘어뜨려 오랜 시간 나를 가두었다. 그렇게 죽음과 삶을 선택지에 올려놓고 저울질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를 잃은 후 삶에 나를 묻어버리고 암흑 속에서 그저 생이 다할 날을 적극적으로 그리며 시간을 죽여 갔다. 그러다가,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죽어야겠다는 강력한 결심은 정작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자 나는 살아야겠다는 생에 대한 진심을 향해 방향을 선회했고 그 순간을 기점으로 나는, 죽음 대신 삶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의 1주기, 장마처럼 비가 쏟아지는 5월이었다. 급경사진 비탈길에서 배수로를 밟고 정말 말도 안 되게 심하게 넘어졌다. 손에는 우산을 들고 있었기에 땅을 짚지도 않고 넘어진 그대로 머리를 시멘트 바닥에 갖다 박았다. 목이 휘청일 정도로 강력하게 바닥에 내팽개쳐진 나는 그 순간에야 진정으로 죽음을 마주했다. 죽거나 크게 잘못될 것 같다는 생각이 번개를 맞은 듯 강력하게 들었다. 내 생이 끝나는 것에 대해서는 하등 생각나지 않았지만, 그 순간 나는 아이의 삶을 내 손으로 망가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아빠를 잃은 지 1년 만에 엄마마저 잃게 될 것이다. 우리 아이는 앞으로 누구의 손에서 자라게 될까, 얼마나 많은 불편한 시선과 차별을 견뎌야 할까. 잃어버린 사랑은 어디서 어떻게 채우며 자라야 할까…. 내가, 이 아이에게서 엄마라는 존재를 빼앗을 자격이, 권리가 있는가. 우리의 아이로 태어나고 싶어 우리에게 온 것도 아닐 텐데, 부모가 되어 아이에게 상실만을 남겨주다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살자. 어떻게든 살아서 아이를 키우자. 아이의 아빠는 불가항력으로 먼저 보낼 수밖에 없었지만 엄마만은 지켜주자_고 마음먹게 되었다.


삶에 묻어버린 나를 내 손으로 다시 끄집어내어서, 그렇게 ‘산다는 것’을 불안정하게나마 갈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죽겠다는 결심이 ‘살아야겠다’로 전환되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내 인생이 극적으로 바뀐 것은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죽음의 흔적을 두 겹, 세 겹으로 걸치고 우울과 불안, 두려움과 공포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순간순간 정신을 차려보면 마음속으로 끝없이 '죽고 싶다, 죽고 싶다.' 되뇌고 있거나 제발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었다. 출근길 운전하면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업무를 보면서, 정신없이 바쁘게 닥쳐오는 매일매일의 일과들을 마주하면서...




엄마라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예고 없이, 준비 없이, 어져 가는 과정의 끝없는 동행이었다.

아무리 배워가도, 아무리 노력해도, 언제나 부족한 것 같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부모가 함께 양육하고 있다고 해도 그럴 진데 자꾸만 다가오는 빈자리는 나로 하여금 많이 슬프게, 크게 쪼그라든 마음을 갖게 만들었다.  


2013년 생인 아이가 여덟 살 되던 해인 2020년. 코로나 팬데믹으로 초등학교 입학조차 하지 못하고 온 식구가 집안에 자진하여 격리되어 있던 그 봄. 아이 아빠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뒤로하고 우리의 곁을 떠났다. 입학식도, 가방을 메고 학교를 가는 모습도, 학교에 다녀와 조잘대는 모습도...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그는 떠나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촐한 입학식을 치르고 아이는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지만, 그마저도 집에서 EBS나 줌을 통해 수업을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복직 한 첫 주, 밥상을 차려놓고 자다 일어나 잠옷 차림인 아이에게 겨우 상의만 챙겨 입혀 태블릿 앞에 앉혀 놓고는 부랴부랴 집을 나섰다. 해가 진 후 돌아오면 나에게는 엉망이 된 집과 엉망진창의 아이가 덩그러니 존재할 뿐이었다. 불도 켜지 않은 채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다가, 엄마 왔어? 하 현관으로 달려오며 밝은 목소리로 반기는 아이를 마주하면 눈물부터 왈칵 솟구쳤다. 점심밥을 챙겨 먹고 전기밥솥 뚜껑을 닫지 않아 남아 있던 밥이 모두 눌어붙어 버린 그날, 배고프다는 아이를 기다리게 할 수 없어 배달 음식도 시킬 수가 없었다. 라면을 끓이며 삼켜낸 슬픔과 눈물은 가슴속 깊은 곳에 지워지지 않는 생채기를 냈다.  8살, 아직 아기 같은 내 아이에게 이런 삶 밖에 주지 못하는 건가. 자책하는 마음과 자괴감은 나의 발목을 잡아바닥을 알 수 없는 늪으로  점점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2학년이 되고 아이는 등교하는 날들이 더 많아졌고, 나는 나 대로 일하랴 살림하랴 아이 키우랴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전날 꼭 날씨를 확인하고 옷이든 우산이든 부족하지 않게 챙겨주려 최선을 다했지만, 기상청의 배신은 여러 번 나의 마음을 저 바닥 깊은 곳까지 끌어내리곤 했다.

그러던 비 오는 어느 날, 아이에게 우산을 쥐어 주고 엘리베이터에서 아이와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여느 때처럼 아이는 1층에서 내렸고, 나는 지하에서 차를 고 출근을 했는데, 비바람이 제법 세차게 불고 있었다. 그런 날은 차로 학교 앞까지 데려다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학교 앞은 차량 주정차 단속이 있고 인도와 도로 사이에 휀스가 있어서 정차가 쉽지 않다. 또 아이는 엄마인 나의 성격을 빼다 박아 학교에서 하지 말라고 교육받은 일을 엄마가 하려고 하면 단호하게 거절하곤 했다. 그런 이유로 아이는 혼자 등교를 했는데 그날 퇴근하고 아이와 마주 했을 때 아이는 심한 감기에 걸려 있었다.

아파트 단지 안을 가로질러서 학교 앞까지 가기도 전에 비바람은 바지를 흠뻑 적셨고 우산은 세찬 바람에 뒤집혀 버렸다고, 시간이 많 지난 후에야 아이는 나에게 이야기를 해 주었다. 감기는 나아가고 있었지만 그 말을 듣고 나는 다시 자책의 늪에 빠졌다. 내가 엄마인가. 그렇게 비바람이 몰아치는데 아이 혼자 보내서 비에 흠뻑 젖 감기에 걸리게 만들다니. 젖은 옷을 입고 하루종일 학교에서 아이가 얼마나 춥고 불편했을까 생각하면 엉엉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시의 심리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일련의 사건은 나로 하여금 흘러가는 시간을 멈추게 했고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런 시간들, 그러니까 회사를 다니혼자서 아이를 키우 삶을 살아는 시간들 내게는 너무나 버거웠다.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자꾸만 생각해야 했다. 살아야 했으니. 어떻게든 나는 살아내어 우리 아이를 키워야 했으니까.

삶의 이유, 내 존재의 이유. 엄마의 역할.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은 그날로부터 나는, 어떻게든 살아 냈다. 그저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버티고 견뎠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아 모든 것은 다시금 감당하기 힘들게 다가왔다. 내가 살아내야 하는 내 삶의 모든 것이 버거웠다. 마음먹는 것 만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나의 상황도 내 아이의 상황도. 다시 한번 내 존재의 이유를 생각해야 했다.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아이를 키울 수 있는 것도 맞긴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아프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아이에게 엄마라는 이름으로 온전히 존재해 주는 것, 그것이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 하고.

오랜 시간 고민한 끝에 2학년 가을, 사직서를 냈. 그리고 아이 곁에 오롯이 엄마로 존재하는 시간들을 지금까지 보내고 있.

그 사이 아이는 많이 자라 주었고, 통장 잔고는 게 눈 감추듯 빠른 속도로 단위를 줄여 가고 있어 이제 곧 다시 경제 활동을 해야겠다 마음먹고 있다.


우선멈춤 한 시간 동안에 '까먹은 돈'과 '벌지 못한 돈'은, 나라는 존재의 목숨값이자 아이 곁에 남겨진 엄마라는 존재의 이름값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값을 치르고서야 겨우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지만, 그 선택만큼은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여전했지만, 심리적으로 감정적으로 너무나 어렵고 힘들긴 했지만, 더 이상 죽음의 방법을 고심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 가장 큰 변화였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을 막을 방법이 나에겐 요원했지만, 적어도 그러한 감정과 생각이 들 때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 만큼은 나의 의지에 달린 것임을 알게 되었다. 치유의 시작은 나의  작은 의지였다.


괜찮아.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괜찮아지지 않아도 괜찮아. 잘 되지 않아도 괜찮아.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아. 살아있다는, 살아낸다는 그것만으로. 모두 다 괜찮아.

잘할 필요 없어, 인정받을 필요 없어, 사랑받을 필요 없어, 그냥 포기하지만 말고, 여기에 존재하자.


것이 나를 살게 한 마음이었다. 그 힘으로 다시 버텼다.

특별한 일 없는 일상을 살아내면서도 끝없이 되뇌던 '죽고 싶다'는 사라지지 않고 현재 진행형이다. 하지만 빈도는 현저히 줄었다. 특별한 자극이 없다면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이렇게 오늘도 불안정하지만, 나는 나의 삶을 갈망한다. 엄마라는 이름값, 나라는 존재의 목숨값을 매일매일 치르며.


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너의 곁에 엄마로 존재해 주는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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