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투명고래 루나 Feb 16. 2024

현실을 버텨, 삶에 묻다

나는 어떻게 되어도 좋았다


네모난 공간 안에 둥근 테이블, 그 위에 나의 네모난 다이어리가 펼쳐져 있다.

불이 켜져 있지만 형광등 불빛은 그다지 밝지가 않아 어둑한 공기가 맴돌았다. 창문 하나 없는 작은 방. 자주 드나들던 내 담당 고객사의 상담실이었다. 앞에는 20대 후반의 덩치 좋은 남자 직원이 등을 최대한 뒤로 기대어 의자 위에 걸쳐진 채, 사원증이 걸린 고개를 비스듬히 하고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찰나의 침묵 속에 그는 두꺼운 금팔찌가 감긴 손을 들어 머리를 한번 넘겼다. 나는, 방금 전에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양. 경련이 난 듯 떨리는 입꼬리를 애써 끌어올리며 다시 한번 읍소했다.


“이번에는 저희 자재도 같이 좀 진행해 주세요...” 


그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말도 할 수 있는 행동도 없었다. 그 뒤로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내 안의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된 무너짐을 감추기 위해 떨리는 손을 마주 잡으며 서둘러 건물을 나섰다. 곧 비라도 쏟아질 듯 어두운 오후였고 바람마저 후덥지근했다. 방문증을 경비실에 반납하고 건물 담벼락 아래 겨우 찾은 자리에 반듯하게 세워놓은 차로 달려갔다. 운전석 문을 열어 몸을 구겨 넣었다. 가방을 조수석으로 옮길 생각도 하지 않고 껴안은 채 그대로 차를 출발시켰다.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당장.




해외 원소재를 수입, 판매하는 업체의 ‘기술영업’ 직이었다. 마흔의 나이를 눈앞에 두고 새파랗게 젊은 ‘구매팀 고객님’께 자근 자근 짓밟혀 너덜너덜해진 채 회사로 복귀했다. 무역회사라고 하기엔 본격적인 무역 업무나 구조는 아니었다. 한국 지사의 포지션이었기에 상대해야 하는 외국인은 본사 직원들 밖에 없었고, 고객은 모두 한국 사람들이었다. 납기가 부러져도, 불량이 터져도, 태풍에 배가 못 떠도, 지진이 나도, 본사에서 던져주는 메일 한 통이 전부였다. 고객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욕을 먹는 건 늘 담당자의 몫이었다. 매일매일 여기서 치이고 저기서 치이면서도 개발팀 고객들을 상대하느라 끝없이 공부해야만 했다. 전공과도 경력과도 무관한 다른 세상의 것들을 고등학교 과학 시간에 공부하던 심정으로 해 나갔다. Tg(유리전이온도), Dk(유전율), Df(유전손실), CTE(열팽창 계수), Impedance, Delamination…. 내 모든 육체적 자원과 정신적 자원을 갈아 넣어 버텼다. 휴대폰이 울리는 게 두려웠다. 고속도로를 달리던 중에도 위험천만하게 갓길에 정차를 하고 노트북을 펴 들어야 했다. 퇴근 후 아이를 데리러 갔다가도 전화 한 통에 아이의 손을 붙잡고 차로 뛰어가 조용히 해달라고 애원하며 운전석에서 급한 업무를 처리했다. 한국인을 나의 고객으로 두는 일은 정말이지 쉽지가 않았다.


 그전에는, 그러니까 아이를 낳고 키우며 경력단절을 겪기 전까지는.

수출을 주력으로 하는 무역 회사의 해외영업 담당이었는데, 아무래도 영어로 고객을 상대하다 보니 그렇게 까지 말로 상처받을 일은 잘 없었다. 일본, 러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말레이시아, 독일 등 여러 나라의 바이어들도 영어가 모국어는 아니어서 업무적으로 사용하는 영어가 크게 어렵지는 않았고, 또 상대에 대한 기본적인 배려가 있었다. 오히려 국내의 여러 제조사 사장님과 임원들로부터 무시와 비 신사적인 언행을 듣고 배척당하기도 했지만, 나는 너구리 소굴이 된 회의실에서 유일한 여성의 성별을 가진 20대 직원이었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분들이셨고 내가 배워야 할 지식을, 길고 긴 경력을 가지신 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명확히 을의 입장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큰 타격은 없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내 일을 사랑했다. 그것도 전공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었지만, 내 일이 좋았고 재밌었다. 결혼 후 난임으로 고생하다가 결국 7년 차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임신, 출산, 육아를 순차적으로 겪으며, 만 3년의 시간을 꽉 채워 육아에 전념했다. 그러고 나니 다시 일이 하고 싶었다. 성취감을 느끼고 싶었고, 사회로 돌아가 내 자리를 찾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헛웃음 밖에 나지 않지만 그렇게나 사회의 일원으로, 조직에서의 내 이름을 다시 가지고 싶었다. 간절했다. 집에서 가까운 중소기업 몇 군데 면접을 보고 합격을 했지만 나의 1순위는 칼퇴근과 주차장이었다. 연봉 조금 더 높다고 조건이 조금 더 좋다고, 퇴근할 때 눈치 보고 주차 못해 몇 바퀴씩 배회하고 싶지는 않았다. 경력이 있어서 재 취업이 수월했다는 사실이 무색하게도 나는 경력단절을 이유로 신입으로 입사했다. 그리고 3살 어린 또라이 여자 상사의 팀에서 새로운 업무를 시작했다. 텃세를 이겨내고 새로운 업무에 적응하기도 만만치 않았는데 내던져진 회사 밖의 일들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이 ‘오너가 돈 많고 여유롭고 조건 좋은 회사'는 사수, 부사수의 개념도 없이 각개전투로 살아남은 자들 만의 고인 물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분위기에서 애사심 따위, 동료애 따위 생겨날 리 만무했다.    




“아니… 이거 말고, 다른 일 하면 더 잘 어울릴 것 같은데…?”


회사로 복귀하는 길 위에서 그의 녹신한 목소리가 복기되었다. 그가 말한 ‘다른 일’은 다름 아닌 ‘사기’였다. 단지 이번 프로젝트에 우리 자재도 넣어 주면, 양산만 타면, 단가를 인하해 주겠다고 말했을 뿐인데 나는 사기꾼이 되어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매출이 좋은 주 거래처들은 이미 기존 직원들이 다 꿰차고 있었고, 나는 돈 안되고 손 많이 가는 업체들을 세 곳이나 떠맡았다. 기존 직원들이 어쩔 수 없이 곁다리로 하나씩 달고 있던 업체들을 옳다구나 하고 종합선물세트로 만들어 나에게 선사해 준 것이다. 고맙게도.  


어린 고객이기 전에 한 인간에게서 받은 모욕은 견디기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자존심을 챙기기보다 목표 지향적인 사람이었다. 나에게 자존심이란, 다른 직원들보다 매출이 적게 나오는 거였고, 다른 직원들보다 능력이 부족하다고 비치는 것이었다. 나 자신의 부족한 점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나라는 인간의 존엄성을 챙기는 선택지보다는 내가 목표한 바를 이룰 수만 있다면 나는 어떻게 되어도 좋았다. 나는 내가 소중하지 않다는 듯, 나를 아끼고 사랑할 줄 몰랐다.


견뎌야 했다. 버텨야 했다. 내 가정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내 손으로 지켜야만 하는 것들이었다. 나는, 절대로 무너질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불투명했고 불안정했지만 나는 나아가야 했다. 앞이 어디인지, 가야 하는 방향이 어디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몰랐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2019년이 끝나가던 겨울, 우리 가족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그 당시엔 회사를 떠나는 것 또한 나의 가정을 지키는 선택이었다. 3년 반을 버텨 이뤄낸  모든 것을 손에서 놓고 사직서를 냈지만 육아휴직으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휴직 4개월 차에 나는, 내가 버텨온 이유였던 무촌의 가족을 잃고 말았다. 모든 것이 거기서, 그날, 끝났다. 돌아가지 않으려고 버티고 버티다 휴직 8개월 차에 복직하여 나는, 다시 지옥 속으로 떨어졌다. 어차피 구분 따위 할 수 없었다. 여기든  저기든  내가 발 딛고  선  그 모든 곳이 지옥이었으니...


그렇게 현실을 버텨 하루하루를 살아내 보았지만, 도저히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삶에게 물었다. 정말, 이제 그만하면 안 되는 걸까? 나 좀 이제 놓아줄래?


더는… 못하겠어……  


삶에 나를 묻었다.



햇빛 한 줌 희망삼기 어려웠던 나는, 삶에 나를 묻었다


이전 02화 우울은, 한 번에 나를 덮치지 않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