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웅크리며 이불을 끌어당긴다.
제법 쌀쌀해진 새벽녘 공기에 몸이 깨어진다.
달라진 코 끝의 공기를 느끼며 주섬주섬 수건을
챙겨 화장실로 들어서, 반쯤 뜬 눈으로 샤워기를
틀고 머리부터 적시며 하루를 시작해 본다.
물줄기의 온기가 닿는 순간
‘아 - 따뜻해’ 말이 절로 나온다.
앗 가을이구나. 여름이 이제 정말 떠났구나.
어깨 위로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가 순식간에 온몸을 감싼다. 마치 뱃속의 태아가 된 듯 온몸이 힘이 빠지고 스르르 눈이 감긴다.
분명, 엊그제만 해도 미지근한 물로 목욕을 하며
개운하게 하루를 시작했는데,
오늘은 차갑게 느껴지는 미온수를 조금 더 오른쪽으로 틀어 몸과 마음을 데워내 차분한 아침을 맞이한다. 목욕을 하는 순간에도 느껴지는 계절의 변화.
그러고 보니 조금씩 달라져가는 풍경들이 닿는다.
미세하게 알싸해진 아침공기, 왠지 더 멀어진 듯한 하늘, 짙어진 녹색 사이에 피어난 이름 모를 들꽃,
듬성듬성 물들어가는 나뭇잎, 더 진하게 느껴지는 커피 향. 아이스컵과 머그잔 사이에서 멈칫하는
손등을 보며 이때만 할 수 있는 고민을 즐긴다.
눈에 보이고 살결에 닿는 미세한 변화들을 느낄 수 있는 찰나의 때들로, 태어나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동적인 일인가, 벅차기까지 하다.
하루, 이틀 아니 날씨가 도와준다면 일주일 정도,
어쩌면 매일동안 나는 가을의 등장을 힘껏
음미해 본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나무를 보고 사람들의 옷차림과 표정, 매일 보는 풍경들을
한번 더 구석구석 보려 애쓴다.
난 이렇게 계절이 변하는 순간을 좋아한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물들어가는 것이, 자연의 일부가 된 듯 인간이라는 작은 존재임을 깨닫게 한다.
그럼 모든 걱정과 고민, 노여움들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를 느끼며 다시 한번 겸손함과 감사함으로 하루가 채워진다.
기분 좋은 음미를 하며 청명한 하늘을 보는 것도
잠시, 그 풍경에 ‘ 빨래 널면 잘 마르겠다 ‘
집안일 생각을 하고 만다. 청소하고 집어넣을
선풍기, 개고 꺼내야 할 반팔과 옷가지들, 정리해야 할 이부자리 등 할 일이 줄줄이 소시지 마냥 따라온다.
‘ 아, 주부 다 됐구만! 계절의 변화에 집안일부터 떠올리다니 ‘
집안 살림들도 순리에 맞게 알아서 움직여주면
얼마나 좋을까. 천고마비의 계절답게 한층 무거워진 몸을 일으켜 뭉그적거려 본다.
매일 하는 이 지겨운 설거지에 이름도 모르는
재즈 음악을 한번 틀어보고 집중하지 않아도
괜찮은 가을 배경 영화를 보며 빨래를 개고,
사지 않을 트렌치코트와 부츠를 보며
남지 않을 일상을, 지금의 순간을 즐기며
기억은 날아가도 감정만은 고일 수 있게 하루를
사랑하도록 한다.
( 한층 더 센티해진 일기를 마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