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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깨끗한 어둠이요, 티 없는 밑바닥이었음을

by 김아현

제일 먼저 윗옷과 상의를 벗었다. 그리고 바지와 양말을 순서대로 벗었다. 아마 침대 부근일 것이다. 거리 감각을 대강 느끼며, 어두컴컴한 방에 풀썩 주저앉았다. 거북목으로 바닥을 향하던 시선을 나는 모른다. 다만, 빈 동공으로 가득히 어둠이 몰려오고 있는 것 만 알 뿐이었다. 잔상이 머릿속을 격렬하게 헤집었다. 떨칠 힘이 없다. 참고 있었다는 걸 알 길이 없다. 당장 어둠이 필요한 나는, 내일의 나는, 참느라 또 참고 있는 나를 모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내인가. 나는 인내를 배웠던 것일까. 나는 인내를 배운 대가로 잔상을 얻었다. 조각으로 나뉜 몸들이 덤덤히 걸어왔다. 영원히 올 것 같았다. 끝나지 않는 흐름이 무엇인지 보여주겠다는 듯이. 필멸자에게 한 수 알려주겠다는 듯이 영원히 올 것 같았다. 힘을 잃었다. 밑바닥을 보는 건 쉬운 일이었다. 기어이 밑바닥과 긴밀한 관계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생각보다 혼탁하지 않았다. 위로가 되지 않았지만 벗어나고 싶지도 않은, 다만 어둠에 둘러싸인 내가 편했을 뿐이다. 그 사이 어두워 보이지 않던 방의 형체가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알았던가. 빈 동공에 가득 찬 건 그러므로 나의 깨끗한 어둠이요, 티 없는 밑바닥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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