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도 아니잖아

스물여섯 엄마의 아홉 번째 일기

by 김아현

딸과 아들을 차별하는 부모 밑에서 받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이따금 내밀한 아픔이 진물처럼 터져 나오거나, 나선 곡선을 타고 끝없이 떨어지는 기분이 들 때면 어떻게든 자신을 다스리려 명상과 심리 공부에 의지하곤 했다. 그보다 한참이나 어린 나로서는 옆에 있으면서도 당연히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속마음이 알게 모르게 들리는 것 같았다.


이 따위 상처 완전히 없어지는 건 바라지도 않아. 흉터라도 좋으니까, 제발 덧나서 나를 괴롭히지는 말아 줘.


조용하고 치열한 투쟁 같다고 생각했다. 그가 품고 있는 해묵은 상처의 기원도, 모습도 알 수 없었지만, 백년전쟁에 버금갈 만큼 진절머리 나는 내적 갈등에 이미 다칠 대로 다쳤단 걸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언제부터인지 모를 시간. 결코 짧다고 볼 수 없는 시간 동안 그는 어린 자신부터 성인이 된 자신에게까지 얼마나 많은 화살을 무차별적으로 쏘아댔던 걸까. 상처에 상처를 덧대며 자신의 많은 부분들을 깎아내려했던 긴 시간을 어떻게 버텼고, 건넌 것일까. 멀쩡한 자신에게 흠을 내는 일만큼 무의미한 슬픈 공격은 없단 것을 알기에, 그저 못 들은 척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위로해 주겠단 오만한 생각을 앞세워 괜찮다고 말을 건넬 수도 없었다. 나는 그보다 한참 어리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는 겉으로는 나보다 훨씬 밝고 단단해 보였다. 매일 업무 상황을 주고받는 과장님과의 소통도 나보다 자연스럽고 유연했다. 꼭두새벽부터 일터로 나와 계단을 청소하시는 아주머니께 사무실 과자를 챙겨드리기도 했고, 힘든 유학 생활을 끝내 포기하지 않고 마무리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며 변변한 자리를 얻지 못하는 불안에 시달리고, 잠조차 깊이 들지 못하는 그의 모습을 볼 때면, 그를 감싸는 어두운 막의 기원이 부모로부터 받은 차별 때문은 아닐까—내심 그렇게 추측하곤 했다. 나는 참을 수 없었다. 공문 작성에 집중하는 척 생각을 하며 혼잣말로 그에게 답했다.


얼마나 힘드셨어요, 저 같아도 조선시대 계급적 관념에 박혀있는 부모가 있다면 너무 싫을 것 같아요. 미울 것 같아요. 당신은 부모를 증오한다고 하지만, 그냥 딸을 딸로서 사랑해줬으면 하는 그 단순한 부탁을 거절당하며 살아온 기분을 합하면 증오라는 말로 표현되지 못할 미움의 상태일 것 같아요. 조선시대는 이미 600년 전에 막을 내렸는데, 요즘 같은 저출산 시대에 딸을 밀어내는 부모가 있다니 너무 놀라워요. 배부른 소리처럼 들리기도 하고요. 저희 어머니 같으면 온갖 반박과 쌍욕을 마다하지 않으셨을 텐데요. 진짜 이해 안 된다고.


그에게 들리지 않을 말이었고, 애초에 그가 들을 말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순간 나도 모르게 울컥하는 감정이 얕게 솟구쳤다. 화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생각에 잠겨 공문 작성을 멈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깜빡거리는 마우스 커서를 보고서야 깨달았다.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며 속으로 혀를 찼다. 차별이란, 쓸데없이 사람의 멀쩡한 자존감을 갉아먹는 데는 기가 막힌 솜씨가 있구나, 중얼거리듯 읊조렸다. 정말 그 누구에게도 영양가 없는 삶의 태도란 생각이 내면에 각인되고 있었다. 그러자 순간 이런 기분이 들었다. 어제보다 그에게 조금은 너그러워진 것 같은 기분이.


[스물여섯 엄마의 아홉 번째 일기 전문]


1996.6.1.(토)


오늘은 결핵을 예방하기 위한 BCG 예방접종 날이다. 토요일이라 남편과 함께 아기를 안고 외출하니 기분이 전환되어 좋았다. 아침 일찍 서둘렀는데도 보건소에는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그중 같은 날 분만한 분만동기를 만나서 어찌나 반갑던지,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도중 둘째 아기가 또 딸이라서 우울하다고 하신다. 아니나 다를까 셋째를 꼭 낳을 거라고 하는데, 셋째가 아들이라는 보장도 없고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분만을 왜 또 하려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어봤더니 남편이 3대 독자에 외동아들이라고 한다. 가슴이 답답해져 오면서 저 집안에 저 자리가 내 자리가 아니라는 게 정말 감사하게 생각되었다. 난 아들만 4명인 집안에, 그것도 대대로 딸이 귀한 집안에 시집을 가서 딸 낳고도 이렇게 대접을 받고 있는데 조선시대도 아니고 아들. 딸에 왜 그리 집착을 하는지.

먼저 들어간 아기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에 살짝 긴장이 되었다. 우리 아현이도 저렇게 울까 싶어서. 아니나 다를까 주사 바늘이 들어가는 순간 “으앙” 태어나서 처음 겪는 아픔이지? 얼마나 서럽게 울던지 엄마도 따라 울 뻔했단다. 그렇지만 2,65kg으로 태어나 힘이 없어서 우유도 제대로 못 먹고 크게 울지도 못하던 아현이가 아프다고 우렁차게 울어대니까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는 거 같아 솔직한 마음은 다행스럽기도 하고 안심도 되었어. 접종 부작용으로 발진이나 열이 날 수도 있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아직까지는 이상증상이

없네. 다행이지만 더 지켜봐야 될 거 같아. 오늘 밤 무사히 잘 지나가기를.